밑줄긋기

[만화/나리타 미나코] 사이퍼

haleyeli 2008. 6. 29. 10:39
<사이퍼>를 처음 본건 열일곱살 때였다. 미국온지 일년 되었을 때 첫 여름방학을
앞두고 소위 종업식이라는 것을 하고서(그래봤자 단지 학교에 나갔을 뿐이지만...
마지막 날은 거의 공식적으로 학교에 안나와도 되는 날이었는데 그걸 몰랐고 또한
그런건 상당히 불량한(?) 행동이라고 생각한 해일리가 학교에 갔더니 어떤 클라스는
달랑 나하나 앉아 있기도 했고 어떤 클라스는 기껏 갔더니 선생이 무지 귀찮아 하면서
(저도 못가니까) 그냥 가라고 했다. 거의 나랑 비슷한 시기에 미국온 한국 애들만이
학교에 남아 있던 형편이어서 소위 문화적 충격이라는 것을 느끼다가 우리 만화책이나
보자 하면서 만화방으로 달려갔다. 물론 그후엔 절대로 마지막날에 학교에 가지 않았다.^^)

암튼 그때 골랐던 것이 <사랑은 약속이야>란 열두권짜리 작품이었다.
그당시 내가 그것이 어떤 비중을 가지고 어떻게 열광되는 작품이었던가를
알았을 리는 만무하다. 거기다 난 정말 순진하게도 작가가 타이틀에 써져
있던대로 한보아란 사람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신인인가부다 생각할 수밖에... 지금이라면 그림만 보고도 일본만화와
한국만화를 가릴수 있다. 좀 심하게 하면 그림을 가리고 글씨만 보여줘도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의 문체 정도는 맞출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번역체의
문체는 아무리 가릴려고 해도 티가 나니까 등장인물의 이름이 아니더라도
대사만 듣고서도 그 작품의 국적을 가릴수 있는 것은 만화 좋아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일 것이다. 그러면 그때는? 그때는 면역이 없었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순진했던(?) 해일리가 어찌 작가 이름을 사기쳤으리라고 생각이나 할수 있었겠는가...-_-;;;

별다른 기대를 하지않고 빌렸었기 때문에 매우 뿌듯해 하면서 봤던 기억이 난다.
어찌나 신선하고 새롭고 잔잔한 가운데 일상적인 심리묘사를 그리도 탁월하게
해내는지... 이야, 괜찮은 신인 하나 건졌다라고 뿌듯해했었다. 끝까지 그렇게
뿌듯해하며 봤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니, 오히려 나중에 더 충격을 먹었을라나?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건 몇권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뭔가 미묘한 느낌이 이상하게
달랐는데 특히 사이퍼의 한국인(그러니까 일본인) 친구가 등장했을 무렵부터
확실하게 이상하단 낌새를 눈치채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때까지도 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고정관념의 힘은 이래서 무섭다.-_-) 그들이 한국(그러니까 일본)을
방문하면서 서서히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물고기 모양이라든지 이해가 안가는
명절이라든지 밥먹을 때 각자 상을 놓고 먹는다든지 하는 것들... 설마 하던게
현실로 다가오자 황당한 허무감에 한동안 입만 벌리고 있었다. 어, 속았네... 하던
그 얼떨떨함... 이렇게 괜찮은 작가가 일본 사람이었단 말야? 하는 배신감...
아, 그때의 기분을 뭐라고 표현할까. 물론 그때 이후로는 일본 작가들이 아무리
한국이름을 달고 나왔어도 헷갈릴 염려 같은건 없었다. 정말로 혹독히 배신당하고(?)
뼈저리게 얻은 경험이었다.(지금 생각하면 귀엽지만 그때는 진짜로 충격 받았었단 말입니다.-_-)

어쨌건 그 당시에 작가가 누군지는 모르고 있다가 그후로도 가끔씩 생각만 하다가
<알렉산드 라이트>를 읽으며 이상하게 친근감 느껴지는게 이상하다 싶었더니
어떤 인터넷 페이지에서 무심코 <알렉산드 라이트>를 검색해보다가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올라와 있던 <사이퍼>의 줄거리를 읽으며 다시한번 멍해졌다.
그게 그거였구나... 아, 그게 생각보다 유명했던 작품이었단 말이지? 하던 충격,
그리고 묘한 즐거움. 적어도 내 개인사적으로는 절대로 잊을수 없을 작품이었던
<사랑은 약속이야>가 많은 이들에게 화자되는 작품이었다니 내가 괜히 엉뚱한
거에 발목 잡힌건 아니었구나 하는 뿌듯함 같은 것이 있었다.

이 <사이퍼>는 강경옥님의 <17세의 나레이션>같은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비슷한 나이대를 살아가는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아이들의 살아가는 이야기...
같은 느낌이랄까. 충분히 무거울수 있음에도 적절한 선을 넘나들며 때로 산뜻하고
종종 유쾌하며 때때로 공감어리고 가끔씩 우울하기까지 한 것이...

어쨌건 가끔씩 나를 괴롭혀오던 -그렇다면 원작자는 누구인가- 하는 고민에서 깨끗이
빠져 나올수 있어 반갑고 그가 내 생각보다도 훨씬 좋은 작품을 쓰는 작가였단 것이 고맙다.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그 기쁨을 종종 누릴수 있을 것이 즐겁다.
<내추럴> 역시 상당히 좋아하고 있으므로...


이 글은 1/25/2002 에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