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만화/이케다 리요코] 베르사이유의 장미

haleyeli 2008. 6. 29. 10:36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처음 본건 중2 봄이었다.
만화방에서 읽을게 너무 없길래 고르고 고르다 어쩔수 없이 골라들게 되었다.
별로 마음이 가지도 않았던게 당시 만화방에 있던건 두꺼운 책 한권에 세권씩이
묶여져서 총 세권으로 나왔던 촌스런 꽃분홍색 표지를 자랑하고 있었다.
해적판이다 보니 종이질은 물론이고 인쇄상태도 매우 안좋아서 전체적으로
그림도 많이 뭉개져 있었고 조악했다. 그러니 정이 갈 리가 만무였다.

그래도 어쩔수 없지 않은가. 볼것이 없으니. 그 당시만 해도 만화방에 다니던
초창기라 집에 만화책을 함부로 빌려가지 못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책을
만화방에 앉아서 봤는데 그것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막 만화방에 다니기
시작하던 시기였고 그전까지의 한유랑이니 전영희니 이수미니 하는 류의
만화나 이상무, 이현세류의 황당만화가 아닌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내가 거의 처음으로 본 순정만화다운 순정만화였다. 낡은 만화방 소파에
앉아서 아무 기대 없이 펴들었던 그 책이 나의 사춘기 시절을 뒤흔들어
놓았던 <베르사이유의 장미>였다.

그후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소장하고 싶다는 열띤 소망을 가지고 있다가
그 직후 서점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던 흰색 표지의 <베르사이유의 장미>
아홉권과 외전 두권까지 총 열한권을 엄마를 졸라서 구입했다.
그때 한권에 2천원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열한권이니까 2만 2천원.
그 당시로 볼 때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까운 줄 몰랐다.
지금은 내가 벌어도 그렇게 한꺼번에 많이씩 구입 못하니 돈 아까운 줄 모르던
그때가 더 좋았다. 하긴 그때 <드래곤볼>도 27권인가까지 구입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우리엄마도 참 불쌍했었다.^^

그전에 이미 스테판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 평전을 읽어서 그 여자에 대한
대략의 이야기는 대충 알고 있었다. 또한 즐겨보던 세계사 책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를 심리적으로 또한 무조건
악역으로 판단하던 전작들과 달리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오락적인 면에 더
치중을 했으므로 별 부담없이 볼 수 있었다. 그당시 순수한 혁명의식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그 반대 세력에 있던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인 비판보다는 좀더 유보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 여자의
시선에서 서술된 것에 대해서도 크게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원탑 주인공이었더라면 내가 과연 그것에 열광할수 있었을까.
마리 앙투아네트는 없어도 오스칼은 있어야 했다. 그 증거가 오스칼이 이미 죽은 9권에
대해서는 시들한 마음에 별로 손대고 싶지 않았더라는 것이다. 이 오스칼이라는 인물이
그당시 내게 미친 영항은 대단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일부러 남자같이 걷고
목소리도 굵게 내고 했었다. 같은 반 애들한테 목소리 흉내내며 남자같애?
하고 물어보고 이상하다면 낙심하고 비슷하다면 좋아하고...

그 열광은 꽤나 오래갔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젤 마지막장에는 오스칼,
마리 앙투아네트, 페르젠의 생년월일이 나온다. 오스칼의 생일이 12월 3일인가 그랬었다.
그래서 어쩌면 실존 인물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나는 온갖 서점들에서 프랑스 혁명사를
뒤지며 오스칼이란 인물을 찾아내려 애쓰곤 했다. 끝의 생년월일이 설정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그녀의 존재를 믿고 싶어했다.
하다못해 교과서에도 빠짐없이 등장했던 들라크루아인가 하는 화가의 가슴을 다 드러낸
자유의 여신 그림도 오스칼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어찌나 좋아해서 책들을 뒤졌던지 당시의 나는 지금보다도 더 프랑스 혁명의 연표와
사건들을 줄줄이 외우고 있었다. 지금은 어떤 정부가 언제 들어섰었는지도
헷갈리는데 그때는 온갖 기억력을 거기에만 집중을 하고 있었나보다.

그후에 <베르사이유의 장미>보다 훨씬 기억에 남는 <올훼스의 창>을 읽고 역시
유리우스에 미쳐 지내고 기껏해야 1,2년이 지나지 않아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평이한 구조들을 시시하게 생각하게 되고 난 후에도 오스칼에 대한 그 마음만은
꽤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나는 그런 친구, 혹은 연인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파름문고인가 하는데서 마리 스테판드바이크 원작이라 해서 조그만 책이 나왔었지.
물론 그것도 읽었다. 내용이 많이 틀렸지만 원작과의 차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원작자의 프로필까지 자세히 나와 있어서 그게 사기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아니, 파름문고에서 나오던 시리즈들을 꽤나 재미있게 보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주 그럴듯하게 조작된 사기였다니... 진실을 알고서 허탈해 했다.

조금만 주의깊게 봤더라면 <남녀공학>에 나오던 뉴욕주립 중학교의 수업방식이나
풍경이 지나치게 동양적이라는 것을 알았을텐데. 도대체가 미국의 중학교에서 누가
중간고사라고 도서관에 남아서 공부를 하느냔 말이다. 아예 final 빼놓고는 그렇게
전체적으로 보는 시험 자체가 없는 것을. 그래도 그때는 그게 진짜인줄 알았다.

이래저래 일본의 옛 작품에 대해서는 엉뚱한 추억을 가지고 있을 사람들이 꽤 많게 되었다.
결말까지 여기저기 제각작이니 어느게 진실이고 어느게 거짓인지도 판단이 안선다.
나만해도 불과 얼마전까지도 파름문고의 비밀(?)에 대해서 새까맣게 몰랐으니까.
그게 파름문고인지도 몰랐었다. 그냥 아무생각 없이 봤는데 나중에 어디엔가에서
그 사태에 대해 읽다보니 그게 그거였다. 참, 이래서 세상은 재미있다.
그럴듯하다고 해서 다 진실은 아니라는 진리를 이토록 온몸으로 체험하게 해주다니 말이다.


이 글은 8/15/2004 에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