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일본 드라마] 세기말의 시
haleyeli
2008. 6. 29. 10:40
아니면 일본 드라마의 시스템이 노지마 신지라는 독특하고도 걸출한
작가를 탄생시킨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세기말의 시>는 꽤
내 취향에 들어맞는 작품이었다.
원래 성향 자체가 감정기복이 심하고 극적 사건이 난무하는 설정을
별로 즐기지 않기 때문에, 아니 그런 설정들이 지나치게 뒤죽박죽으로
뒤섞이는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야겠지만 듣기로는 꽤 파격적인
작품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는 그리 복잡하지도 신기하지도 않았다.
그동안 내가 꽤 이런 작품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반증이겠지.
각 회마다 사랑에 관한 짧은 이야기들이 주제가 되고 그 주제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한다. 거기에는 무작정 아름다운 사랑, 혹은 순수한
사랑은 등장하지 않는다. 처절한 사랑, 변덕스런 사랑, 이기적인 사랑,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지며 인간의 본성에 대해 탐구해 나간다.
이 옴니버스 스토리에 시종일관 등장하며 극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이
다케노우치 유타카와 진짜 이름은 모르는(-_-) 모모세 교수, 사토미 선생, 미야 등이다.
일본 배우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다케노우치 유타카는 순수하고 어리숙한 노아 와타루
역을 매우 능청스럽게 소화해낸다. 비치보이스에서의 엘리트 청년, 별나라 금화에서의
제멋대로 도련님, 얼음의 세계에서의 이성적인 보험조사관, 냉정과 열정사이에서의
고독청년과는 또다른 분위기였다. 사실 그러고보면 다케노우치는 조연시절에 꽤 이런
어리버리한 역할을 맡았던 듯 싶다. 제목도 기억안나는, 대충 1,2번만 보고 끝내버렸던
몇몇 드라마에서 자주 그런 모습의 다케노우치를 봤던 기억이 난다. 쟤가 주인공보다
더 괜찮은데 하며 안타까웠더랬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세기말의 시>는 몇 년전 작품이니
이 드라마에서 그가 특별히 이미지 변신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그는 어떤
이미지도 꽤 진지하게 어울리는, 그리고 그 이미지들을 무척 훌륭하게 소화해내는
괜찮은 배우임에 틀림없지 않나 싶다.
처음부터 너 정체가 뭐야? 했던 미야는 역시 그렇군 하는 느낌이었고 꽤나 부패교수처럼
등장했던 모모세 교수는 갑자기 인생의 달관자가 되어 모든 사건의 키를 쥐고 흔들어 댄다.
그게 무척 신기했다. 그렇게 도사같은 양반이 왜 그랬대? 하는 느낌이랄까.
뭐 그 사건을 통해 일종의 개과천선을 한 거겠지. 과거도 발목을 잡았고.
사토미 선생은 자세히 보면 나카야마 미호와 마츠시마 나나코를 좀 닮은듯도 싶은데
그게 묘하게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마스크를 가진듯한 느낌이 든다. 그다지 미운 얼굴이
아님에도 좀 촌스러웠다. 그리고 사토미 선생님. 그대의 패션감각은 정말 너무한다 싶지
않습니까? 아니 어째 20년전 패션을 입고 다니십니까. 그러고 보면 일본드라마의 여자들은
옷이 매우 촌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머리모양도 허구헌날 그 모양이고. 요즘은 좀더
나아진 듯 싶은데 내가 일본드라마를 처음 봤던 10년 전에는 정말 경악 그 자체였다.
개인적으로 일본드라마의 표현의 자유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어쩌면 한국드라마는 그런 생각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체검열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탓이겠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쪽대본과 사전제작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바가 클 것이다. 그러므로 똑같이 충분한 시간을 두고 제작이 되는
영화에 와선 오히려 한국영화의 수준이 월등히 높은 것이 아닐까. 아무튼 일본드라마
특유의 과장과 오버가 이 드라마에서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런 면들이 일드에
몰입하는데 무진장 방해가 되었었는데 다행이다 싶다. 물론 모모세 교수의 씬에서는
역시나 하는 감정과잉이 표출 되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무척 깔끔한 구성과 결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일본드라마는 캐릭터의 승리다. 어느 인물 하나도 전형적인 인물이 없다.
모든 등장 인물들이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그 역할을 충분히 완수해 낸다.
한회에 한씬만 등장했던 치아키와 그 동생들 마저도 드라마에 없어서는 안되는 감초와
복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걸핏하면 헤메는 한국드라마와는 딴판이다.
이런것들은 일차적으로 제작환경의 차이에서 기인할 것이다. 하다못해 반이라도
촬영을 끝내고 방영을 시작한다면 확실히 해결될 문제가 아닐까 한다.
사족 하나, 개인적으로는 5회의 내용이 제일 인상깊었다. 무지 뻔한 얘기였는데
진짜로 일을 저지르다니, 하고 놀라버렸다.
사족 둘, 3회의 그 노출신(-_-) 필요하긴 했지만 오올, 진짜로 그래도 되는 환경이란
말이지 하는 마음이랄까.
사족 셋, 마지막의 풍선사건. 인간적으로 혼자힘으로 그 많은 풍선을 어떻게 띄우냐?
그 짧은 시간에. 그건 너무 오버였어.
사족 마지막, 헬로 베이비 하며 주제를 나타내는 매 끝회의 설명과 등장인물들의
과거를 마치 뮤비처럼 편집해 보여주는 엔딩은 매우 뛰어난 발상이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가 끝난후에도 적절히 여운이 남는 것이 오래된 앨범 같았다.
-4/2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