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앵무새 죽이기라니...
그러나 누구나 한번쯤 읽었을 법한 이 책을 추천하기로 나는 두달쯤 전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새로운 책을 안 읽어서가 아니라 (읽기는 두어달 동안에 적어도 30여권은 읽은 듯...)
이 책이 내게 미친 잔상이 꽤 길고 오래가기 때문이다. 원래 나는 책을 즐겨 읽으면서도
누가 가장 감명깊게 읽은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재미있게 읽은책이 너무 많아서이기도 하고 반대로 잔상이 남는책은 그리 많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또한 순전히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그런데 언젠가부터 앵무새 죽이기는 그런 난감한 상황에 꽤 적절한 추천도서가 되어주고 있다.
(읽던 그 당시에는 몰랐다.)
앵무새 죽이기는 내가 미국에 오기전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기도 하다.
나는 93년 9월 12일에 미국에 왔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미국에 올 거라는걸 이미 알고 있었고 그러므로 나는 여름방학때 읽은
태백산맥이 한국에서 읽은 마지막 책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미국에 오기 며칠전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이거 한번 읽어볼래? 하고 들이민 책이 앵무새 죽이기였다.
당시 제목은 ‘아이들이 심판한 나라’였다.
집에 와서 아무생각 없이 읽었던 그 책은 뜻밖에 매우 재미있었고 그 당시엔 그걸로 끝이었다.
미국에 와서야 나는 그 책이 엄청 유명하다는걸 알게 됐다.
원제가 ‘To Kill a Mockingbird"인 그 책은 미국 고등학생들의 필독서이다.
또한 미국의 고등학교 영어시간은 1년에 한권 정도 교과서 외의 문학작품을 공부하는데
나는 10학년때 그 책을 배웠다.
처음 학교에서 그 책을 받아들고 몇페이지를 읽어나가 는데(아주 힘들게...-_-;;;)
어딘지 낯설지가 않았다. 읽다보니 과연 그 ’아이들이 심판한 나라‘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이후로 그 책을 읽지는 않았다. 힘들게 안 읽어도 시험은 잘 봤으니까...
책을 많이 읽어서 생겼던 유일한 부작용이 그것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책을 모두 읽었기 때문에 힘들게 영어로 읽지 않았다는것.
그 당시에는 룰룰랄라 했지만 영어공부 하는데 도움이 안되었을 것임은 당연하 다.
9학년때 오딧세이, 11학년때 허클베리 핀의 모험, 12학년때 호밀밭의 파수꾼이 모두 그런 과정을 겪었다.
그뿐인가. 교과서에 실렸던 세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 조이 럭 클럽, 또 뭐가 있더라...
’앵무새 죽이기‘는 영화로도 나와있었기 때문에 며칠동안 수업이 끝나기 5분이나 10분전에는 영화를 봤다.
그레고리 팩이 주연했던 그 영화는 솔직히 내게 책만큼은 재미가 없었다.
거의 두어달 정도 학교에 서 그 책을 배웠다.
물론 수업시간 내내는 아니고 교과서 수업을 병행하며 1,20분 정도씩이었던 걸로 기 억한다.
힐러리 로댐 클린턴은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에서 ’앵무새 죽이기‘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때 힐러리는 그 책을 학교에서 처음 배웠을까 문득 궁금했었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시기도 맞지 않고
그 당시 에 그 책을 학교에서 가르칠 정도로 미국이 인종문제를 심각히 여겼을 것 같지 않기는 하다.
‘앵무새 죽이기’를 몇 번 읽으며 작가인 하퍼리에게 몇가지 궁금했던 점이 있다.
남부의 중산층 가정 출신인 작가가 어떻게 인종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와
그 책이 출간된지 40여년이 지난 지금 그는 인종문제에 관해 지금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것.
40년전보다는 확실히 인종문제에 관해 미국은 진보하고 있다.
적어도 백인들은 속엣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놓지는 못한다.
메이저리그 아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일급 마무리 투수였던 잔 락커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소수계가 반이 넘는 LA에서도 소소 한 차별은 늘상 겪는다. 그것은 설움이기도 하다.
내 발음을 못알아 듣는척 하는 백인들도 있고(첨엔 진짜로 못알아 듣는줄 알았는데 한 단어를
열번쯤 반복하다 묘한 비웃음을 띄고 있는 그 사람을 보고 깨달았다. 쟤가 나 지금 놀리는 거구나...)
왠 정신나간 할머니는 학교같다 오던 나를 보고 다짜고짜 니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소수계가 비교적 적은 타주에서는 더욱 그렇다. 애리조나의 스타벅스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하다
끝까지 못 알아듣는 척하는 종업원 때문에 그냥 나온 사람도 있고 메인주의 마켓에 가서 칠면조를 사려다
죽어도 못 알아 듣겠다는 점원에게 결국 종이에 스펠링을 적어주고 간신히 칠면조를 사온 사람도 있다.
솔직히 아무리 발음이 안좋아도 Turkey 발음이 안나오겠는가.
그냥 혀 약간 꽈서 ‘털키’라고 하면 되는것을 말이다. 어디에서 왔냐는 말은 지금도 종종 듣는다.
라스베가스에 갔을때, 뉴욕에 갔을때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LA에서 왔다고 했다가 서로
난처한 상황이 된적도 있다.
그 사람이 원한 대답은 그게 아니었고 그렇다는 것을 나는 대답을 하고 난후에 깨달았으니까.
멀리 갈것도 없이 바로 LA에서 그런 상황을 당해봐라.
LA에 사는 사람에게 어디 사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Where are you from?'이면 차라리 났지 ’Where do you live?' 라길래 LA라고 했다가
서로 뻘쭘해지는 그 상황이라니...
대부분 밥 먹으러 가서 서브하는
사람이 딴에는 친절하게 말 건다고 그런말 하는거라 뭐라고 하기도 뭐하고 말이다.
LA에 산지 10년이 넘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한국에 사는 사람인건가.
차라리 그럴땐 어느나라 사람이냐고 물어줬으
면 좋겠다. 그러면 확실히 한국사람이라고 대답해 줄 수 있을텐데...
그나마 나같은 사람도 그러니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2세들이 아이덴티티의혼란을 겪는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한국말을 못해도, 영어만 하고 사는데도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묻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천히나마 미국은 나아지고 있다.
그들의 뿌리깊은 편견이 무엇이건 간에 집에서 부모님이 무의식적으로 무슨 말을 하건간에
적어도 학교에서는 정식으로 가르친다.
흑인, 인디언, 아시안들에 대한 차별을 정식으로 배우며 특히 백인 선생님들일수록 인종에 대한
미국의 잔혹성을소리높여 외친다. 그리 순수하지 못했던 나는 진짜 속으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하고 실눈을 뜨고 보기는 했지만 말이다.
소수계가 반이 넘는 캘리포니아의 특수성 때문일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것을 정식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그 사회가 그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어릴때부터 그 부조리함을 배우고 자라며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래야 한다’라고 끊임없이 주장하는 것들이 그런 과정을 통해 ‘당연히 그런것’이 되어간다.
처음부터 당연히 그랬다면야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면 그러기 위한 노력마저 멈추어서는 안되는것 아닌가.
그런 과정을 통해 콜린 파월은 최초의 흑인 대통령감으로까지 거론되었다.
현실적으론 터무니없다. 그러나 50년전이었다면 거론이나 되었겠는가.
앞으로 100년뒤에도 여전히 인종문제는 커다란 이슈로 남아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끊임없이 그 문제를 거론하는 이들이 존재하는한 200년뒤의 우리 후손들은
역사교과서에서나 인종차별이 무언지 배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흑인 대통령도 아시안 대통령도 여성 대통령도 탄생할 것이다.
많은이들의 고통과 설움을 반석으로 삼아 ‘당연히 그런것’이 되는날이 올 것이라고,
와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여년간 나는 ‘앵무새 죽이기’를 정식으로만 네 번정도 읽었다.
좋아하는 것에 비해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닌 셈이다.
그러나 그리 적다고도 할 수 없는 숫자인데 희한하게도 지난 네 번을 읽는 동안
항상 마지막 부분이 생각이 나질 않았다.
읽으면서는 안타까워 했지만 다음에 읽을때는 그 불쌍한 흑인이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더라?
하는 것이 생각이 나질 않았다. 유죄인지 무죄인지 조차도.
한자한자를 열심히 읽었음에도 그런일은 처음인데 읽을때마다 새로이 생각하게 하기위한 무의식적인
뇌의 작용인가 해서 스스로도 재미있고 어이없기도 했다. 네 번을 읽은 지금은 끝이 생각이 난다.
아마도 다섯 번째 읽을때는 좀 더 편하게 읽을수 있게 될까.
그리고 나는 세상을 좀 더 알았나 보다.
처음 읽었을 때는 애티커스 핀치조차 위선적으로 보였지만
(네딸이 흑인과 결혼한다면 어쩔건데? 하는 심술궂음이 내게 있었다.)
지금 이시점에서 나는 그가 좋은사람 이라는걸 안다.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에’서 맥스웰 회장이 이런말을 했다.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이들이 웃을수 있어야 한다는걸 안다고.
읽은지 오래되서 정확한 문장이 기억나지는 않는데 맥스웰 회장의 이 말이
지금 내가 디오티마에서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대사다.
내가 심술궂게 생각했던 것처럼 애티커스 핀치조차 어쩌면 그 마음 깊은곳에 편견을 지니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이 얼마나 소중한가.
생각하지 않는 이들도 많고 알더라도 시작하지 않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60년대에는 수치와 도덕을 모르는 백인이라도 성실한 흑인보다 고귀할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지는 않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그 모든 현상은 마침표를 찍었는가.
아니, 여전히 현재진행이다.
그 지난한 작업은 미래의 어느 때쯤에 유쾌한 마침표를 찍을 것인가.
또한 한국은 지금 어느 시점에 와있나. 시작을 하기는 했나.
그런 의미에서 ‘앵무새 죽이기’는 21세기가 된 지금도 여전히 그 가치를 지닌다.
사실 그것이 즐거운 일은 아니다.
이런 책은 20세기에 이미 화석이 되어 박물관에서나 만날 수 있었으면 좋았을 뻔 했다.
ps. 오바마가 대통령 되기 3년전 쯤에 쓰여진 글...
이 글 쓸땐 사실 흑인 대통령이 이렇게 빨리 나오리라곤 예상 못했었다.
즐거운 오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