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2011. 1. 30. 14:47

이 블로그엔 오래전 썼던 글들이 많은데 모두 옛날 홈피와
야후 블로그에 있던 글들을 옮겨놓은 것들이다.
그런데 나도 잊고 있던 옛날 글들이 더 있었다.
컴퓨터를 뒤지다 뜻밖에 옛날에 썻던 글들이 나왔다.
무려 7,8년전의 글들이다.
맙소사. 이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니...
오늘 올리는 글 몇개는 모두 몇년 이상 컴퓨터 안에 사장되어 있던 글들 모음이다.
따라서 현재 세태와는 맞지않는 부분도 좀 있을 듯...
기록의 의미로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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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라는 단어가 있다. 단순한 뜻풀이로는 '외상'인데 여기서 좀 더 풀어나가자면 예전의 충격이
마음에 남아 이후까지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라고 어디에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작가 박완서의 트라우마는 6.25 전쟁이 아닌가 한다. 6.25와 오빠의 죽음.
그 모든 것들은 몇십년이 지나서까지 박완서의 가슴속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작가를 쉽게 놔주지 않는가보다.


데뷔작인 나목에서 여주인공은 6.25의 폭격으로 인해 두 오빠를 잃은 전력이 있다.
단편인 엄마의 말뚝 등에서도 작가의 어린시절은 생생히 묘사된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 아닌 목마른 계절에서도 그 상처는 생생히 표현된다.


먹고 산다는 것. 가장 원초적이며 몇몇 고상한 척하는 사람들이라면 눈살을 찌푸리며
모른척할지도 모를 그것. 바로 그것을 작가는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진다.
굶어죽어도 학처럼 고고하다는 선비의 이야기는 작가에겐 먼나라의 꿈일지도 모른다.
하기야 그 선비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그 부인네는 허리가 휘게 삵바느질 하며 음식을 장만할 것이다.


목마른 계절에도 사랑은 등장한다. 그러나 사랑이 주제는 아니다.
여자와 남자의 아름답지만 가슴아픈 사랑보다 한끼의 음식을 장만하기 위한 투쟁과 오빠에의 반항,
안타까움, 사랑이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힘이 된다. 살아야지, 살아야해, 어떻게든 살아야해...
그러므로 하진은 빈집을 뒤지며 음식물을 훔치고 그 음식물을 병신이 된 오빠는 혐오하면서도
받아먹을 수밖에 없다.


너무나 증오하고 미워하고 경멸하고 그러면서도 그 모든 감정을 다 합친 것보다도 사랑한 그녀의 오빠.
그토록 지겨웠어도 살아만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죽어버려서 더욱 안타까웠던 그 오빠.
먹고 살아야 했다는 것, 그리고 오빠가 죽었다는 것. 그 상처는 세월이 지나며 희석되어 이제 작가는
그 경험을 자신의 작품속에 담담히 풀어놓을수 있게 되었나 보다. 그러나 그 상처는 결코 없어지지 않아
어떤일을 해도 뇌주지 않는 줄이 되어 작가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도 있는가 보다.
담담하면서도 날카로움이 특색인 작가의 작품을 대할때마다 나는 그것을 느낀다.


언제쯤이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진정 자유롭게 되면 작가는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까.
어쩌면 그 트라우마가 그녀 작품의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독자로서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그것이 반이상은 그의 자서전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목마른 계절을 선택한 이유이다.



이 글은 2003년 4월 25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박완서 선생님 돌아가시고 왠지 울적하던 차에 이 서평을 발견하게 되었다.
덕분에 이 글을 선생님 추모글로 생각하고 올리기로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목마른 계절>이란 이 작품은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내가 써놓은 내용이지만 내용만 봐서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기억이 나기는 하는데 아마 내가 당시에 꽤 재밌게 읽었나 보다.
조만간 선생님 자서전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
대해서도 써 보고 싶다. 그런데 <그 여자네 집>도 이 시리즈에 들어가던가? 내용이 잘 기억이 않난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김수환 추기경님, 박경리 선생님, 최태영 박사님, 리영희 교수님에 이어
박완서 선생님까지...
시대의 어른이 한 분씩 떠나시는 것은 슬픈 일이다.

Posted by haleyeli
밑줄긋기2011. 1. 30. 14:22

                                              왼쪽부터 순서대로 칼리엘라, 글라우커스, 샤르휘나, 미카엘



‘인생은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가진다. 때론 그 의미가 처절한 슬픔을 내포한다 해도 슬픔 속에는 빛이 있다. 보석보다 찬란한 진실의 빛이...’



아르미안의 전편을 사정없이 관통하는 이 멋진 나레이션. 10여년을 이어오면서도 일관되게 변질되지 않았던 주제. 그러나 과연 그들이 얼마나 예측불허의 인생을 살았나. 사실은 누구보다 더 예정된 운명을 살지 않았었나?



캐릭터...


레 마누-‘첫 번째의 운명은 왕관과 명예와 아픔’

원래 이름도 레 마누의 후계자란 뜻의 마누아였을 정도로 태어나면서부터 여왕으로 길러져왔다. 냉정하고 잔인한 성품의 소유자. 아르미안을 위해서라면 사랑하는 사람도 갓 태어난 아들도 이용하고 버릴 정도로 철저히 아르미안을 위해서만 살아간다. 그러나 가장 냉정하면서도 가장 정에 약한 사람이 바로 그녀가 아닐까. 동생들이 지들 일만 챙길때도 레마누는 동생들을 잊은적이 없었다. 샤리조차 쫓아낸 후에는 눈물을 흘렸고 스와르다의 죽음을 잊지 않았고 실어증이 된 아스파샤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마누엘 대신이었을 지라도 피아도 지극한 모성으로 키웠었지. 아르미안을 통털어 여성 캐릭터중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이다. 정말로 이런 여자가 되길 원했었다. 샤르휘나가 불새의 깃털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왕위를 넘겨주고 은둔한다. 미래를 내다본다는 샤르휘나는 마누의 피와 땀이 서린 아르미안을 방치해뒀고 결국 마누가 모든 것을 걸고 성장시킨 아르미안은 역사속으로 사라져간다. 레마누의 고생은 헛고생이 되고 말았다. 아들까지 희생시켜가며 지키려던 나라인데 그녀의 삶의 존재 이유였는데... 신들 나라에서 놀다온 불새가 한바탕 휘젓더니 세속의 인간군상들은 그저 추풍낙엽처럼 저만치 흩어지더라...

                                                                          레마누와 리할



스와르다-‘두 번째의 운명은 고귀함과 사랑과 슬픔’이 맞던가? 헷갈리는군...-_-;;;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불린다. 온화하고 자상한 성품. 언니의 남편인 리할을 죽을 때까지 사랑했고 결국 그 때문에 남편에게 죽는다. 진짜 인물이라길래 성경을 뒤졌더니 구약 에스데전에 갈대아 출신의 황후로 달랑 몇줄만 기록돼 있어서 실망했던 기억이... 첨에 읽을 적에는 절대로 이해할수 없었던 캐릭터. 그깟 사랑하나 못잊다니. 나이 들어서 다시 읽으니 가장 불쌍하고 측은했다. 물론 그녀의 사랑을 이해할수 없는건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어쨌건 네딸들중 그녀만 서로 사랑이 아닌 일방통행이 아닌가 말이다.

                                                                   스와르다와 크세르크세스



아스파샤-‘세 번째의 운명은 인내와 총명과 진실’

외유내강의 성품을 지닌 영리한 여자. 온유한 성품과 미소아래 아무도 꺽을수 없는 고집과 굳셈을 지니고 있다. 평생을 페리클레스를 위해 살아간다. 딸조차 버리고... 원래는 아르미안에서 가장 좋아했던 캐릭터가 아스파샤였다. 약한 것 같은데 사실은 누구보다 강한. 거기다 안그런 듯 말발까지 센 이 여자가 좋았다. 근데 막판으로 가면서 짜증이 났다. 그렇다고 딸까지 버리냐? 네 인생은 오직 페리스를 통해서만 의미가 있지? 뭐 이런 것 때문에 아스파샤에 대한 처음의 감정을 끝까지 유지시키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아스파샤 역시 실존인물이란 말에 첨엔 그리스에서 첨으로 여자를 교육시켰다는 그 아스파샤인줄 알았다. 10학년때 World History 시간에 그 여자 이름이 나오길래 혼자서 아, 아스파샤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페리스 가까이에서 훌륭한 일 하면서 사는구나 하고 헤벌쭉 거렸는데 웬걸, 화려한 착각이었다.-_-;;;

                                                                     아스파샤와 페리클레스


샤르휘나-‘네 번째의 운명은 파멸과 방랑과 기적 속에서 그 의미를 찾으리라.“

아르미안의 실질적인 주인공이자 ‘뜨거운 감자’. 얘 주인공 맞어? 지혼자 하는 일이 도대체 뭐가 있어. 지지배, 인복도 많어. 네가 그러고도 아마조나냐? 운명을 바꾼대매 결국은 운명대로 다하네. 샤리를 보면서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밖에 없다. 거기다 성격마저 내가 가장 싫어하는 타입인 철 모르고 싱그런(?) 웃음을 지으며 천방지축 나대는 캔디 타입이니. 거기다 지 언니가 모든 고뇌를 무릅쓰고 물려준 왕위를 헌신짝 버리듯 해? 그러고서 신경도 안쓰다가 결국은 없애버리지. 그러면서 충성스런 대신들은 무슨 수준낮은 아이 대하듯이 하고. 운명은 무슨 운명이야. 너 신들이랑만 놀아서 인간세상은 시시하다 이거지. 그래 너혼자 잘 날라다녀라. 첨부터 이러더니 끝까지 이러다 끝났다. 암튼 첨부터 끝까지 정이 안가는 캐릭터였다.-_-;;;

                                                                  샤르휘나와 에일레스


리할 - 레마누의 남편. 마치 전형적인 여주인공같은 캐릭터의 남자였다. 그야말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레마누가 리할을 담보로 갈대아 총독에게 돈을 긁어냈었죠.^^) 페르시아 황제도 함부로 못한다는 오타네스 가문의 귀한 후계자가 레마누 농간에 놀아나다가 진실을 알고 ‘팽’ 해서는 돌아서는 꼴이라니... 뭐 어쨌건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지는 잘못한거 하나도 없지만 마누라 잘못 만나서 휘둘리다가 끝까지 한번 튀어보지도 못하고 사라져갔다.


크세르크세스 - 스와르다의 남편이자 페르시아 황제. 원래 역사속에서도 초반 공정하다가 후반에 타락하는 황제로 쓰여지는데 여기서는 그 이유가 스와르다 때문인 걸로 그려졌다. 구약 에스데전의 주인공인 에스데 황후역시 스와르다의 대역인 존재였고. 장신에 풍체는 좋지만 콧수염은 너무 아저씨틱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래서 해일리에겐 별 점수를 얻지 못했다지요. 해일리는 얼굴 밝힘증이랍니다.^^ 어쨌건 남자의 질투는 치졸함과 동시에 나라까지 망친다는 사례를 온몸으로 증명한 남자.


페리클레스 - 바로 그 그리스 황금시대의 페리클레스라지요. 기억을 잃고 페르시아에 노예로 팔려온걸 아스파샤가 구해주게 된 인연으로 그녀의 운명의 상대가 된다. 도적떼에 당해서 목숨이 달랑거렸다가 샤리의(실제적으로는 에일레스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된후 아스파샤에 대한 기억을 잃고 다시 페리클레스로 돌아온다. 이는 아스파샤에게 기나긴 고난의 시작인 동시에 더불어 내가 그녀에 대한 애정을 거두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강인한 온유함을 지닌 남자지만 솔직히 별로 정가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으, 여자의 유혹에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남자니라. 유혹은 지들이 당해 놓고 왜 탓은 여자탓만 하냐고. 그러면서 여자가 사탄이래지.


에일레스 -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전쟁과 파멸의 신. 신들의 서자같은 존재였으나 오히려 그들보다 더 성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도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흑단같이 길다란 머리 휘날리며 안하무인 천방지축 날뛰는 전형적인 순정만화의 남자 주인공같은 캐릭터였다. 거기다 신이라니... 그보다 더 빵빵한 직업 있음 나와 보라구 해. 사실 첨엔 그래서 무조건 싫어했는데 하두 오랜 세월 기다리다 보니 그 감정도 무뎌져서 나중엔 그저 보기만 해도 반갑게 되고 말았다. 사실 샤리와의 삐리리씬, 같은건 좀 에로틱하기도 해서 순진한 감수성을 자극하기도... 나중엔 지나치게 순해져서 위험스런 매력이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넌 그냥 날뛰는게 최고란다.


미카엘 - 여자 캐릭터중에 레마누를 가장 좋아했다면 남자 캐릭터중엔 최고로 내 사랑을 받은 남자였다. 아, 사실 오히려 중성적인 존재인가? 암튼 그 무조건적인 샤리에 대한 사랑이 사실 이해가 안갈 때조차도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한결 같을수 있을까.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비현실적인 캐릭터다. 생긴거 봐라. 현실적이게 생겼나. 에휴, 그저 이쁘고 불쌍해서 내가 다 안타까웠다.

                                                                        아름다운 미카엘


글라우커스 - 자수정의 수호자. 샤리의 이복오빠이기도 하다. 참 정이 가는 캐릭터였다. 미카엘 다음으로 아니, 나중에는 거의 비슷하게. 오히려 샤리에 관해서는 미카엘보다 그의 행동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아마도 샤리 일행중 가장 계산적이고 차가운 머리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일 것이다. 흑마술까지 써가며 더 이상 자수정의 보호를 받을수 없게 될 정도로 그녀를 돕지만 샤리에 대한 감정이 애정인지 증오인지도 모를 정도로 모호하기도 하다. 샤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녀를 돕도록 안배된채로 준비된 존재라면 그 자신의 존재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 하나로서의 존재 가치는 없단 말인가. 선택받은 그의 동생을 보조하도록 선택된 글라우커스. 같은 선택임에도 참 꿀린다. 아버지를 만났을 때 자신의 존재 이유를 묻던 그에게 ‘아들아...’ 한번 부르더니 네 동생은 앞으로 험난한 길에 놓여 있다며 그녀를 도우라고 말하던 그들의 아버지. 참 열 받았었다. 그렇다고 그걸 그냥 넘어가고 계속 샤리를 도와? 제대로 따지지도 못하고? 빙신, 아마 넌 샤리를 사랑한게 맞을거다. 어려서부터의 세뇌에 너 스스로도 넘어가서 샤리없인 살수가 없게 되어 버렸을 거라구. 알어?


칼리엘라 - 레마누 다음으로 좋아하는 여성 캐릭터이다. 첨에 심술궂은 고양이로 등장했을땐 나중에 그렇게 활약이 커질줄 몰랐다. 초반부엔 질투에 눈먼 여자에 대한 선입견대로 행동하는 여자같아 맘에 안들었는데 성장을 하면 할수록 매력적인 존재가 되어갔다. 글라우커스랑 쿵짝도 잘맞았고. 차라리 둘이 사귀지. 그러고보니 둘이서 등장하는 일러스트도 좀 있는거 같던데... 칼리엘라의 마지막을 잊을수가 없다. 머리를 풀어 마지막 불꽃을 일으키던 그녀. 샤리에 대한 애정으로 빠지지 않은 유일한 그녀의 일행이 되었다. 아니, 그랬으면 큰일이었나? 암튼 미카엘에 대한 애정 하나만으로 목숨을 버리는 칼리엘라. 역시 이해할수 없긴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그녀의 매력이 퇴색되는건 아니지만...


케네스 - 레마누의 호위대장이자 평생을 그녀만을 바라보고 살아간 남자. 오히려 리할보다 더 강하게 어필된 남자. 레마누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우직한 정인. 아마도 레마누도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마음의 감정과는 또 다르게 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익숙함과 추억을 동반하는 것이니까.


포이보스 - 지혜의 신. 초반부터 끝까지 신들 중에서는 에일레스 빼놓고 젤 많이 줄기차게도 등장한 인물일 것이다. 첨부터 아군의 냄새를 풍긴 바다의 여신 라아나와는 다르게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로 간교와 모략, 계책의 냄새를 풍기던 느끼한 남자. 그토록 똑똑한 척하더니 결국은 지꾀에 지가 빠져버리고 말았지. 에일레스는 성장할 수 있었고 그는 성장할 수 없었으니까.



대략의 중요한 캐릭터들만 집어넣었는데도 이정도다. 이외에도 언급하지 않은 중요 캐릭터도 부지기수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대작인지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10여년이 걸려 완성되었으며(이게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고민한 적도 있었을 정도다.) 마지막 세권이 나오는 데만 거의 5년여가 걸렸다. 내가 처음 아르미안을 보던 중2때 이미 25번까지가 나와 있었으니 난 마지막 세권을 보느라고 그 세월을 기다린 셈이다.


96년엔가 완결이 났다는 것을 알았지만 정작 마지막을 본건 그후로도 3년여가 지난 99년이다. 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렇게도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건만 막상 끝났다니까 두려움이 앞서버린 것이다. 최근에 퇴마록에도 그런 감정을 느꼈었지. 어쨌건 27번까지는 봤는데 겨우 마지막 한권 가지고 정리를 얼마나 어떻게 해서 완결을 내었을지가 도무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실망할까 두려웠다는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그러다 새천년을 맞이하기전에 봐주자 해서 빌려 봤는데 역시 그 이외의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는 생각이다. 가장 적절한 결말.


그러나 아쉬움은 남았다. 신화에서 현실로 끌어내려진 느낌이 들었다. 물론 아르미안이 무너지고 불새가 날아다니는데 어떻게 현실이냐고 하겠지만 그런 모든 것들에서 세속의 냄새를 맡아버렸다. 특히 아스파샤에 대한 부분. 우우~~~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직 페리스만을 위해 그 세월을? 그리고 그때쯤에 가면 신일숙님의 설명체의 나레이션이 더 이상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던 때가 되고 말았다. 예전엔 느끼지 못했던 나레이션의 거북스러움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느껴지기 시작한건 리니지 때부터였는데 그래도 아르미안에선 적절하게 사용되었다고 생각하다가 막판에서야 느껴지는데 환장하는 줄 알았다.-_-;;;


<마누엘>이란 단편은 차라리 없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그 자체의 생명력을 갖지 못하고 그저 본편에 딸린 부록으로만 느껴지는 이 단편은 어떠한 극적 긴장감이나 두근거림도 없이 그저 설명으로만 일관 하다가 오히려 어린 그들의 이후에 대한 상상력까지 반감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고 생각한다. 어린 마누엘이나 피아를 보면서 얼마나 그들의 미래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었는데... 차라리 상상이나 제대로 하게 놔둘 것이지. 어린 마누엘은 신비했었는데 어른 마누엘은 으으으~~~ 너무 평이했다. 어떤 매력도 없었다. 마누엘과 피아의 만남의 과정 역시 그냥 잘 설명된 번역소설을 보는것만 같았다. 거기다가 오, 리할 불쌍하여라. 별루 관심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던 리할이 그냥 사정없이 불쌍해졌다. 꼭 젋고 탱탱해야 남자냐? 리할도 젊었을땐 잘생겼었다. 그러니까 니가 반했잖아 안그래? 신일숙님. 그냥 리할은 가끔씩 쓰라린 가슴을 달래며 그래도 새 아내랑 잘먹고 잘 살았다고 전해지게 두지 그러셨사옵니까. 리할 할아버지 동정하다가 단편을 다 읽고 말았나이다.T-T


중학교 시절에만 세 번을 봤었는데 그때는 볼때마다 새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었다. 워낙 길다 보니까 꼼꼼하게 읽어도 놓치는 부분이 있었는데 커서 보니까 한눈에 다 들어오는것이 내가 뭐 가지고 머리썼었지? 하는 감정이 드는 것이 좀 씁쓸하기도 했다. 방대한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비튼다거나 대사가 난해하다거나 내용이 어렵다거나 하는 것이 없이 충실히 이해가 되는 것은 그 친절한 나레이션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지나치게 친절해서야 도전정신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부작용을 낫는다. 아르미안이 그 충실한 교본이 아닌가 한다.


하고 싶은 말을 줄이고 줄인다고 했는데도 이정도가 되고 말았다. 청소년 시절을 함께 보내서 그런지 트집잡고 싶은 것도 많고 아쉬움도 많다. 그렇더래도 처음 만화에 입문하는 이들에겐 빠짐없이 추천해주고 싶고 소장하고 싶은 책 탑텐을 나열하래도 어김없이 들어간다. 이러니 애정이 지나치면 애증이 된다지...-_-;;;


여담 하나. 어릴적에 처음 제목을 보구선 아르미안이 나라 이름인줄 몰랐다. 아르미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네명의 딸들에 대한 얘긴줄 알았다. 그런데 읽다 보니깐 진짜로 아르미안의 네딸들에 대한 얘기더군.^^



이 글은 2001년 8월 18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이건 분명 야후 블로그에 올렸던 기억이 나는데 어느샌가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야후에서 티스토리로 옮길 때 누락 되었던 듯...

Posted by haleyeli
밑줄긋기2011. 1. 30. 13:43


이 블로그엔 오래전 썼던 글들이 많은데 모두 옛날 홈피와
야후 블로그에 있던 글들을 옮겨놓은 것들이다.
그런데 나도 잊고 있던 옛날 글들이 더 있었다.
컴퓨터를 뒤지다 뜻밖에 옛날에 썻던 글들이 나왔다.
무려 7,8년전의 글들이다.
맙소사. 이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니...
오늘 올리는 글 몇개는 모두 몇년 이상 컴퓨터 안에 사장되어 있던 글들 모음이다.
따라서 현재 세태와는 맞지않는 부분도 좀 있을 듯...
기록의 의미로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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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인공은 대부분 인간이다.
가끔씩 동물들이 화자가 되는 책들도 있긴 하지만 그런 그들의 역할도 결국은 주인인
인간에 대한 관찰인 경우가 많다. 이문열의 <오딧세이아 서울>의 주인공 만년필도
결국은 그의 눈으로 보는 인간들을 풍자했었다.
 

인간의 우월감이란 어쩌면 이토록 오만한가. 그리스, 로마신화와 같이 신들의 인격조차도
인간적으로 설정해 놓고 신에 가까이 다가가기를 열망한다. 조금이라도 인간적이지 않으면
마녀로 몰려 화형당했던 중세시대를 생각해 보라. <드래곤 라자>에 등장하는 최강의
크림슨 드래곤 크라드메서도 결국은 인간을 사랑한 나머지 마치 자살이라도 하듯이 사라져 갔다.
 

그런데 이미 몇십년전에 그런 인간중심의 법칙을 깼던 작품이 있다.
다른 많은 이들이 말하는 <반지의 제왕>의 많은 위대한 점에 나역시 동의하지만
내가 <반지의 제왕>을 대함에 있어 가장 유쾌해 하는 점은 <반지의 제왕>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프로도는 호빗이다. 그것도 아무리 인간보다 오래 산다지만
호빗으로서도 그다지 적은 나이라고 할 수 없는 쉰살에 새로운 모험의 길을 떠나게 되는
호빗인 것이다. 인간의 3분의 2밖에 안되는 키를 가지고 털이 부숭부숭한 발에 온순하고
연약하고 게으르고 유쾌하고 낙천적인 사람들. 많은 판타지 소설들에서 그저 손재주 좋은
곁다리 정도로 활약하곤 하던 호빗들은 <반지의 제왕>에서는 인간의 전면에 나서는 활약을 펼친다.
그 대단한 인간들과 엘프, 마법사가 프로도를 보호하기 위해 바삐 움직인다.
프로도는 온순하고 연약한 보통의 호빗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행을 통해 다듬어지고 강해진다.
 절대반지를 파괴하는 것. 그 절대절명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우리 사회에서 서태지라는 이름이 갖는 울림이 그토록 위대한 것은 그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랩의 불모지였던 이땅에 랩퍼 하나쯤 없는 그룹이 없도록 만들었고 1년내내 활동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던 현실에 요즘이라면 신인 그룹조차도 활동중단을 선언하고 다음 앨범을 준비하도록 만들었다.
부작용을 지적하자면 아마도 세대간의 단절을 부추겼다는 것.
그가 읆조리는 빠른 랩을 따라할수 있느냐 없느냐가 신구의 반열을 가를만큼 그는 젊은이들의
 대통령이 되었으며 기성세대에게는 대단하긴 한 것 같은데 왠지 괘씸한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
처음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처음 시도한 자들은 때로는 시대의 반역자로 몰려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영원히 위대한 선구자로 추앙되기도 한다.


지금은 당연시되고 있는 판타지의 세계. 아름다운 엘프와 욕심사납지만 손재주 좋은 드워프,
조그만 호빗과 탐욕스런 오크들이 당연스레 등장하는 사회. 그가 만들어낸 언어.
북유럽의 신화를 모티브로 했다지만 그 모든 것들을 정착시켜 놓은 한가운데에 그가 있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놓은 그 세계를 우리들은 정신없이 흡수하며 또한 그 세계관을 사용한
수많은 다른 작품들을 대한다. 지금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처음이었던 시절도 있다.
당연하지 않았던 것들을 당연하게 만든 장본인인 톨킨은 <반지의 제왕>을 치켜들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들을 호령한다. 우리는 그앞에 고개숙여 절하면서
<반지의 제왕>을 탐독하며 그를 바탕삼아 또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마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을 이야기하던 우리네 전래동화처럼 그것은 그렇게 세월과 함께 흘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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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알라딘에서 독자 서평을 쓰면 주장원, 월장원 등을 뽑아서 도서 상품권을 줬던 적이 있다.
지금도 하는지는 모르겠든데 암튼 이 서평을 쓰고 그 당시 운좋게 30만원 도서 상품권을 받았다.
아마 십여년 전일듯... 알라딘에서 저 글 긁어와서 한글에 저장해 놓은게 2003인 것을 보니.
서평이다 보니 피상적으로 좋은 말만 늘어놓은 경향이 강하다. 좀 닭살 돋는다.
근데 나 서태지 무지 좋아했나 보다. 여기 저기 많이 우려먹었네...
근데 사실 서평은 황금가지 판으로 탔는데 제대로 읽은건 예문 판이다.
덥석 황금가지에서 나온 여섯권을 구입해놓고는 다 읽지 못했다.
그 말투 때문에... 그게 원작을 살린 거라도 서사시 읽는 기분이 들어서 도저히 못 읽겠더라.
황금가지 판은 몇년전에 팔아 버렸는데 그 후에 씨앗에선가? 또 책이 나왔다고 들었다.
언젠간 구입해야지.

Posted by haleyeli
밑줄긋기2011. 1. 30. 13:30

이 블로그엔 오래전 썼던 글들이 많은데 모두 옛날 홈피와
야후 블로그에 있던 글들을 옮겨놓은 것들이다.
그런데 나도 잊고 있던 옛날 글들이 더 있었다.
컴퓨터를 뒤지다 뜻밖에 옛날에 썻던 글들이 나왔다.
무려 7,8년전의 글들이다.
맙소사. 이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니...
오늘 올리는 글 몇개는 모두 몇년 이상 컴퓨터 안에 사장되어 있던 글들 모음이다.
따라서 현재 세태와는 맞지않는 부분도 좀 있을 듯...
기록의 의미로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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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말괄량이 삐삐하면 어떤 이미지들을 떠올릴까. 자유, 유쾌함, 즐거운 고독...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해 삐삐는 내게 향수이다. 나는 그를 통해 돌아올 수 없는 시절의 꿈을 꾼다.
삐삐처럼 사는게 꿈이었던 어린 시절. 그렇게 살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절.
친구들의 꿈이 선생님이나 간호사였던 시절에 나는 삐삐를 꿈꿨으며 보물섬을 찾아가길 원했다.
비교적 철이 들만한 시기였던 중학교 이후까지도 그 꿈은 계속됐고 1년 1년이 흐르며
왜 내게 그런 모험이 찾아오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시기를 지나며 나는 꿈을 잃어갔다.
그리고 요 몇 년은 삐삐를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나는 소위 말하는 ‘어른’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가끔 어린시절의 꿈이 로보트 태권브이를 타고 지구를 지키는 것이었다고 말을 하면
사람들은 ‘너 무지 황당한 애였구나’ 하며 웃는다. ‘내가 좀 깼었지.’ 하며 나도 웃는다.
그런데 그 웃음의 끝이 너무나 씁쓸하다. 왜 그 꿈이 그토록 황당하며 터무니없어야 하는 것일까.
어른이 되어서까지 보물섬을 꿈꾼다면 정말로 어리석은 것일까. 나는 삐삐이고 싶었다.
그처럼 얽매임 없이 훨훨 날아다니고 싶었다. 삐삐일수 없다면 타미나 아니카이기라도
했으면 싶었다. 그렇다면 모험의 끝자락이라도 얻어 가질 수 있을 테니까...


일요일이 갖고 싶어 삐삐는 학교에 갔다. 그리고 일주일에 하루 일요일의 달콤함을 갖기 위해
나머지 6일을 참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싫어 다시 날마다 일요일인 생활로 돌아간다.
그것이 삐삐의 미덕이다. 어린이는 학교에 가야 한다거나 그래서 삐삐가 깨달음을 얻어
모범생이 된다거나 하는 억지스러움을 보이지 않는다. 모든 어른들의 희망에 반하는
삐삐같은 아이는 그러므로 어린이들의 영원한 친구이며 어른들의 영원한 꿈이다.
거기다 금화상자를 가지고 있는 부자어린이의 돈 씀씀이가 기껏해야 친구들에게
나눠줄 캔디 조가리나 사는데 쓰이다니 그런 삐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삐삐는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다. 빨간머리를 양갈래로 땋고 커다란 신발을 헐렁거리며
아빠가 왕으로 있는 식인종 나라를 여행하며 규율의 세계에 있는 타미와 아니카를 모험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들은 어른이 되지 않는 약을 먹었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꼬마 흡혈귀 알리시아는 머리는 성숙한 채로 몸은 자라지 않는 자신을 참을 수 없어하며
자신을 그렇게 만든 레스타트를 저주한다. 꼬마의 몸으로는 성숙한 여인의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친구인 그들은 어떨까. 나만의 이기심이라 해도 그들은 영원히 자라지
않은 채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 자식이, 내 손자가 나이를 먹어 그들보다 어른이 된다 해도
그들은 영원히 모험의 세계를 질주하는 유쾌한 아이들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피터팬이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 네버랜드에서 돌아온 다른
아이들처럼 택시운전수나 교사 같은 직업을 가지게 되는 피터팬은 상상할 수 없다.
 나는 사실 아직도 말괄량이 삐삐가 되고 싶은 꿈을 버리지 못했다. 그것은 정말 꿈인것일까?



이 글은 2002년 8월 30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Posted by haleyeli
밑줄긋기2011. 1. 30. 13:15


이 블로그엔 오래전 썼던 글들이 많은데 모두 옛날 홈피와
야후 블로그에 있던 글들을 옮겨놓은 것들이다.
근데 나도 잊고 있던 옛날 글들이 더 있었다.
컴퓨터를 뒤지다 뜻밖에 옛날에 썻던 글들이 나왔다.
이 글은 무려 7년전인 2003년 6월 28일에 써놓고 잊어먹고 있던 글이다.
맙소사. 이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니...
오늘 올리는 글 몇개는 모두 몇년 이상 컴퓨터 안에 사장되어 있던 글들 모음이다.
따라서 현재 세태와는 맞지않는 부분도 좀 있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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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의 처음을 기억한다. 지금은 대중과의 괴리를 유도한채 신화가 되어버린 사람.
그러나 그의 시작은 대중적 파격이었다. 그의 본질이었던 록을 잠시 손에서 접어둔 채
그는 힙합가수로서 엄청난 부와 인기를 얻는다. 그리고 그는 다시 시작했고 이제는
그가 어떤 음악을 만들어도 그에겐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 바탕엔 <난 알아요>의 대중성과 신화가 자리하고 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판타지 소설가 이영도. 그의 행보에서 서태지를 읽는다면 지나친 비약이라 할까.
그의 데뷔작인 <드래곤 라자>는 누가 읽어도 재밌고 유쾌한 대중적 소설이다.
재기발랄한 문장과 톡톡 튀는 캐릭터들. 누가 그 매력을 거부할 수 있었으랴.
그러나 <드래곤 라자>의 후속이라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들었던 <퓨처 워커>는
뜻밖에도 시간의 난해함을 다룬 작품이었고 다음 작인 <폴라리스 랩소디>는 자유와
복수를 다룬 난해무쌍한 작품이었다.
이 두 작품은 한발 진보된 완성도와 함께 탄탄한 재미도 갖췄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데는 실패, 매니아의 필독서로만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오랜 모색기를 거쳐 <눈물을 마시는 새>가 등장한다.
판타지 소설치고는 무척이나 시적인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이영도라는 작가의
진보와 저력을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
유쾌했던 데뷔작과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바로 그 하고 싶은 말에 눌려버린
듯한 느낌을 줬던(물론 어느 정도는 의도된 것으로 보여지는) 후속작들의
한계에서 벗어나 이영도는 드디어 자신만의 세계관을 창조해냈고 그 안에서
어렵게 빙빙 돌리거나 철학적 수사들을 남용하지 않고도 하고 싶은 말을
간결하게 정리하는 방법을 터득한 듯 싶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그 말도 많고 탈도 많던 한국형 판타지의 진수를 보여줬다는 것이다.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는 이제 더 이상 엘프나 드워프, 호빗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에게도 친숙한, 씨름을 좋아하는 장난꾸러기 도깨비가 활동하며 마립간,
마루나래와 같은 전통적 용어들이 중요한 비중을 가지고 등장한다. 또한 작가는 새로운
종족을 창조해낸다. 심장을 적출하는 불사의 몸을 가진 나가라는 존재가 그것이다.
아마도 앞으로 다른 많은 작품들에서 이 나가라는 존재들이 차용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생생한
묘사와 함께 이 나가들은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없어서는 안될 절대적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낸다.


물론 아쉬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초반 소심하면서도 진중하던 륜의 성격이 그가 용인이 되면서부터 평면적으로 바뀐 것이라던가
<드래곤 라자>에서부터 변함없이 등장하는 긴 세월을 살아가는 고독자라던가, 별로 말재주도
없던 사람이 갑자기 엄청난 독설가가 된다던가 하는 것은 작가의 작품들을 대할 때마다 느끼던
고질적인 아쉬움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작가의 신작들을 읽을때 마다 그런 아쉬움들이 진일보한 반가움으로 변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건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영도라는 이름 석자에서 나는 한국 판타지의 미래를 읽는다.
그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다. 그는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앞으로 더 좋은 작품을 쓸 것이다. 그는 독자에게 믿음을 주는 작가다.
그렇게 생각해주는 독자가 있는 한 그는 행복한 작가다. 그러므로 그의 내일을 믿는다.
 더 반가운 작품으로 우리를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말이다.



이 글은 200년 6월 28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그 후로 후속작인 <피를 마시는 새>가 나왔죠.^^
Posted by haleyeli
밑줄긋기2008. 12. 26. 14:18

 


뜬금없이 앵무새 죽이기라니...
그러나 누구나 한번쯤 읽었을 법한 이 책을 추천하기로 나는 두달쯤  전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새로운 책을 안 읽어서가 아니라 (읽기는 두어달 동안에 적어도 30여권은 읽은 듯...)
이 책이 내게 미친 잔상이 꽤 길고 오래가기 때문이다. 원래 나는 책을 즐겨 읽으면서도
누가 가장 감명깊게 읽은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재미있게 읽은책이 너무 많아서이기도 하고 반대로 잔상이 남는책은 그리 많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또한 순전히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그런데 언젠가부터 앵무새 죽이기는 그런 난감한 상황에 꽤 적절한 추천도서가 되어주고 있다.
(읽던 그 당시에는 몰랐다.)

앵무새 죽이기는 내가 미국에 오기전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기도 하다.
나는 93년 9월 12일에 미국에 왔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미국에 올 거라는걸 이미 알고 있었고 그러므로 나는 여름방학때 읽은
태백산맥이 한국에서 읽은 마지막 책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미국에 오기 며칠전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이거 한번 읽어볼래? 하고 들이민 책이 앵무새 죽이기였다.
당시 제목은 ‘아이들이 심판한 나라’였다.
집에 와서 아무생각 없이 읽었던 그 책은 뜻밖에 매우 재미있었고 그 당시엔 그걸로 끝이었다.

미국에 와서야 나는 그 책이 엄청 유명하다는걸 알게 됐다.
원제가 ‘To Kill a Mockingbird"인 그 책은 미국 고등학생들의 필독서이다.
또한 미국의 고등학교 영어시간은 1년에 한권 정도 교과서 외의 문학작품을 공부하는데
나는 10학년때 그 책을 배웠다.
처음 학교에서 그 책을 받아들고 몇페이지를 읽어나가 는데(아주 힘들게...-_-;;;)
어딘지 낯설지가 않았다. 읽다보니 과연 그 ’아이들이 심판한 나라‘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이후로 그 책을 읽지는 않았다. 힘들게 안 읽어도 시험은 잘 봤으니까...
책을 많이 읽어서 생겼던 유일한 부작용이 그것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책을 모두 읽었기 때문에 힘들게 영어로 읽지 않았다는것.
그 당시에는 룰룰랄라 했지만 영어공부 하는데 도움이 안되었을 것임은 당연하 다.
9학년때 오딧세이, 11학년때 허클베리 핀의 모험, 12학년때 호밀밭의 파수꾼이 모두 그런 과정을 겪었다.
그뿐인가. 교과서에 실렸던 세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 조이 럭 클럽, 또 뭐가 있더라...

’앵무새 죽이기‘는 영화로도 나와있었기 때문에 며칠동안 수업이 끝나기 5분이나 10분전에는 영화를 봤다.
그레고리 팩이 주연했던 그 영화는 솔직히 내게 책만큼은 재미가 없었다.
거의 두어달 정도 학교에 서 그 책을 배웠다.
물론 수업시간 내내는 아니고 교과서 수업을 병행하며 1,20분 정도씩이었던 걸로 기 억한다.
힐러리 로댐 클린턴은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에서 ’앵무새 죽이기‘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때 힐러리는 그 책을 학교에서 처음 배웠을까 문득 궁금했었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시기도 맞지 않고
그 당시 에 그 책을 학교에서 가르칠 정도로 미국이 인종문제를 심각히 여겼을 것 같지 않기는 하다.

‘앵무새 죽이기’를 몇 번 읽으며 작가인 하퍼리에게 몇가지 궁금했던 점이 있다.
남부의 중산층 가정 출신인 작가가 어떻게 인종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와
그 책이 출간된지 40여년이 지난 지금 그는 인종문제에 관해 지금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것.
40년전보다는 확실히 인종문제에 관해 미국은 진보하고 있다.
적어도 백인들은 속엣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놓지는 못한다.
메이저리그 아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일급 마무리 투수였던 잔 락커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소수계가 반이 넘는 LA에서도 소소 한 차별은 늘상 겪는다. 그것은 설움이기도 하다.
내 발음을 못알아 듣는척 하는 백인들도 있고(첨엔 진짜로 못알아 듣는줄 알았는데 한 단어를
열번쯤 반복하다 묘한 비웃음을 띄고 있는 그 사람을 보고 깨달았다. 쟤가 나 지금 놀리는 거구나...)
왠 정신나간 할머니는 학교같다 오던 나를 보고 다짜고짜 니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소수계가 비교적 적은 타주에서는 더욱 그렇다. 애리조나의 스타벅스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하다
 끝까지 못 알아듣는 척하는 종업원 때문에 그냥 나온 사람도 있고 메인주의 마켓에 가서 칠면조를 사려다
죽어도 못 알아 듣겠다는 점원에게 결국 종이에 스펠링을 적어주고 간신히 칠면조를 사온 사람도 있다.
솔직히 아무리 발음이 안좋아도 Turkey 발음이 안나오겠는가.
그냥 혀 약간 꽈서 ‘털키’라고 하면 되는것을 말이다. 어디에서 왔냐는 말은 지금도 종종 듣는다.
라스베가스에 갔을때, 뉴욕에 갔을때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LA에서 왔다고 했다가 서로
난처한 상황이 된적도 있다.
그 사람이 원한 대답은 그게 아니었고 그렇다는 것을 나는 대답을 하고 난후에 깨달았으니까.
멀리 갈것도 없이 바로 LA에서 그런 상황을 당해봐라.
LA에 사는 사람에게 어디 사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Where are you from?'이면 차라리 났지 ’Where do you live?' 라길래 LA라고 했다가
서로 뻘쭘해지는 그 상황이라니...
대부분 밥 먹으러 가서 서브하는
사람이 딴에는 친절하게 말 건다고 그런말 하는거라 뭐라고 하기도 뭐하고 말이다.
LA에 산지 10년이 넘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한국에 사는 사람인건가.
차라리 그럴땐 어느나라 사람이냐고 물어줬으
면 좋겠다. 그러면 확실히 한국사람이라고 대답해 줄 수 있을텐데...
그나마 나같은 사람도 그러니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2세들이 아이덴티티의혼란을 겪는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한국말을 못해도, 영어만 하고 사는데도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묻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천히나마 미국은 나아지고 있다.
그들의 뿌리깊은 편견이 무엇이건 간에 집에서 부모님이 무의식적으로 무슨 말을 하건간에
적어도 학교에서는 정식으로 가르친다.
흑인, 인디언, 아시안들에 대한 차별을 정식으로 배우며 특히 백인 선생님들일수록 인종에 대한
미국의 잔혹성을소리높여 외친다. 그리 순수하지 못했던 나는 진짜 속으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하고 실눈을 뜨고 보기는 했지만 말이다.
소수계가 반이 넘는 캘리포니아의 특수성 때문일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것을 정식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그 사회가 그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어릴때부터 그 부조리함을 배우고 자라며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그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래야 한다’라고 끊임없이 주장하는 것들이 그런 과정을 통해 ‘당연히 그런것’이 되어간다.
처음부터 당연히 그랬다면야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면 그러기 위한 노력마저 멈추어서는 안되는것 아닌가.
그런 과정을 통해 콜린 파월은 최초의 흑인 대통령감으로까지 거론되었다.
현실적으론 터무니없다. 그러나 50년전이었다면 거론이나 되었겠는가.
앞으로 100년뒤에도 여전히 인종문제는 커다란 이슈로 남아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끊임없이 그 문제를 거론하는 이들이 존재하는한 200년뒤의 우리 후손들은
역사교과서에서나 인종차별이 무언지 배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흑인 대통령도 아시안 대통령도 여성 대통령도 탄생할 것이다.
많은이들의 고통과 설움을 반석으로 삼아 ‘당연히 그런것’이 되는날이 올 것이라고,
와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여년간 나는 ‘앵무새 죽이기’를 정식으로만 네 번정도 읽었다.
좋아하는 것에 비해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닌 셈이다.
그러나 그리 적다고도 할 수 없는 숫자인데 희한하게도 지난 네 번을 읽는 동안
항상 마지막 부분이 생각이 나질 않았다.
읽으면서는 안타까워 했지만 다음에 읽을때는 그 불쌍한 흑인이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더라?
하는 것이 생각이 나질 않았다. 유죄인지 무죄인지 조차도.
한자한자를 열심히 읽었음에도 그런일은 처음인데 읽을때마다 새로이 생각하게 하기위한 무의식적인
뇌의 작용인가 해서 스스로도 재미있고 어이없기도 했다. 네 번을 읽은 지금은 끝이 생각이 난다.
아마도 다섯 번째 읽을때는 좀 더 편하게 읽을수 있게 될까.

그리고 나는 세상을 좀 더 알았나 보다.
처음 읽었을 때는 애티커스 핀치조차 위선적으로 보였지만
(네딸이 흑인과 결혼한다면 어쩔건데? 하는 심술궂음이 내게 있었다.)
지금 이시점에서 나는 그가 좋은사람 이라는걸 안다.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에’서 맥스웰 회장이 이런말을 했다.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이들이 웃을수 있어야 한다는걸 안다고.
읽은지 오래되서 정확한 문장이 기억나지는 않는데 맥스웰 회장의 이 말이
지금 내가 디오티마에서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대사다.
내가 심술궂게 생각했던 것처럼 애티커스 핀치조차 어쩌면 그 마음 깊은곳에 편견을 지니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이 얼마나 소중한가.
생각하지 않는 이들도 많고 알더라도 시작하지 않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60년대에는 수치와 도덕을 모르는 백인이라도 성실한 흑인보다 고귀할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지는 않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그 모든 현상은 마침표를 찍었는가.
아니, 여전히 현재진행이다.
그 지난한 작업은 미래의 어느 때쯤에 유쾌한 마침표를 찍을 것인가.
또한 한국은 지금 어느 시점에 와있나. 시작을 하기는 했나.
그런 의미에서 ‘앵무새 죽이기’는 21세기가 된 지금도 여전히 그 가치를 지닌다.
사실 그것이 즐거운 일은 아니다.
이런 책은 20세기에 이미 화석이 되어 박물관에서나 만날 수 있었으면 좋았을 뻔 했다.




ps. 오바마가 대통령 되기 3년전 쯤에 쓰여진 글...
이 글 쓸땐 사실 흑인 대통령이 이렇게 빨리 나오리라곤 예상 못했었다.
즐거운 오판이었다.^^
Posted by haleyeli
밑줄긋기2008. 12. 26. 14:16


7,8편을 오늘 한꺼번에 봤어요.
한숨 팍팍 나오더이다.
마지막편 중반 이후부터는 어이구, 어이구 하는 소리가 절로 입에서 나오던데요.
5,6편은 살짝 지루한 감이 있었는데 막판가니 답답해서 말 그대로 환장하겠더이다.

개인적으로 그 시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게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을 읽으면서부터이니
얼추 10년이 넘었네요. 이인화 작가의 이후 행보는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하긴 하지만
영원한 제국은 '장미의 전쟁'의 플롯을 많이 차용했다곤 하더라도 꽤나 재미있었어요.
사실 그걸 안것도 나중 일이구요.
그후, '누가 왕을 죽였는가', '사도세자의 고백', '영조와 정조의 나라'등을 읽으며 나름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고 정약용이나 당시 실학 관련 책을 읽으면 빠짐없이 언급되는 것이
그 시대의 정치상황이니만치 자세히는 몰라도 대충 훑어볼 정도로는 안다고 생각했는데
예정된 비극을 향해 달려나가는 그들의 모습이 답답하고 또 답답하더이다.

개인적으로는 세 주인공들 보다는 대신들과 대비의 모습을 보는 재미가 더 컸어요.
채승환은 채제공인것 같고 전 그 이판대감은 혹시 이가환이 아닌가 했었어요.
근데 그리...::: 붕당과 철새 정치인들의 모습,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한것없이 죽어가는 사람들. 도대체 몇명의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게 그리 죽어갔을까요.
그 넓은 대궐에 푸른솔은 단 한사람뿐이었더란 말입니까.
그러나 그는 또 어찌 변해갈까요.

그 기생이 마지막에 그러지요. 자신의 아이, 혹은 그 아이의 아이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러나 그런 세상을 과연 지금의 우리들이라도 누리고 있는 것일까요.
참으로 무력하고 무력했던 박상규. 그러나 사실 그 사람의 모습이 대다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과연 얼마나 많은 우리들이 바라는 만큼 한발짝 걸음이라도 떼고 있을까요.
지금 그나마 무언가를 바라기라도 하지만 내가 변해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까요.
10년, 20년뒤의 내가 그토록 환멸해마지 않던 그 무리들의 한사람이 되어있지 않다고
자신있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단체에 매몰되지도 않을것이나 단체를 막무가내로 경멸하지도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단지 소수의 취향을 가졌다해서 그 마이너 기질이 마치 어떤 특권인양 으시대는 것 역시
허세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솔직히 어떤때는 나도 모르게 겸손한척 잘난척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럴때면 소름이 끼칩니다.
그래도 스스로 깨닫기라도 하니 아직은 순수한 겁니다.
그걸 깨닫지도 못하는 날이 오면 그날이 바로 내가 나를 잃게 되는 날이겠지요.

그들은 한게 아무것도 없지요.
그러나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은 권세를 누릴 것입니다.
지금도 그러할까요. 그러나 그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알지 못합니다.
그게 답답하고 분하지만 세상이 그렇더이다.
허 참, 헛웃음 한번 치고, 어이구, 한숨 한번 쉽니다.
그래도 세상은 안변합니다. 참 씁쓸하지요.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나라는 인간 하나는 어찌 그리도 무력하고 하잘것 없는지 기가 찰 지경입니다.


덧, 약간 뜬금없지만...
이덕일 선생님의 저작들에 매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분 글들 매우 재미있어요.
하지만 요즘은 당분간 자제를 부탁드리는 마음입니다.
그 왕성한 집필력에 경탄을 금치 못하지만 솔직히 최근의 저작들은
너무 옛것을 우려먹는 느낌이 강해요.
작가 특유의 시원스런 느낌이 사라지고 여기서 보던 내용, 저기서 보던 내용들이
뒤섞여 이제 더이상 그 분 책을 사고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역사스페셜에 조언을 많이 주셨다 하더라도 그 프로그램에서 다뤘던 내용들을
책으로 내시는 것을 선호하시는 경향이 있는데 TV로 한번 보고 지나갈 내용들을
글로 다뤄주심은 감사할 일이지만 너무 비슷한 내용들로 책장을 채우는건 좀 그래요.
그래도 여전히 그 분 책이 나오면 살까말까 한번쯤은 망설이게 되니 참 대단하세요.
그 대단함을 조금 더 갈고 닦았으면 하는 바램이 그리 건방진 것은 아니지요?

Posted by haleyeli
밑줄긋기2008. 12. 26. 14:15


5권 후기에 93년에 구상이 됐다고 하던데 그러면 일본에서 실제로 연재되었던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아시는 분 계세요?
예전 해적판 시대, 그러니까 어색한 한국이름으로 바꿔서 일본 해적판 만화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기에 이 만화 3권을 봤던 기억이 나요.
시리즈 였는지 아님 3권 분량만 따로 떼어 단편으로 만들었었는지는 기억이 안나는데
제가 봤던 첫권이 3권 분량이었어요.
1,2번 볼때는 전혀 눈치 못채다가(본적이 없으니 당연하지-_-) 3권 보면서 이거 어디서
봤는데 하는 생각이 들다가 3분의 1쯤 보면서 생각났어요.
그당시 제목은 기억 안나구요. 3권 이후의 분량을 봤는지도 기억이 안나네요.
드문드문 본것 같기는 한데 대체적으로 처음본 기억이니 못봤을 가능성이 높지요.
그당시 보면서 게이만화도 계몽만화도 아닌것이 설정이 뜬금 없으면서도 (앞부분이
존재했기 때문이라는게 이제야 이해가 가네요.) 묘하게 독특한 것이 취향에 들어맞지
않으면서도 쉽게 잊혀지지는 않는 그런 작품이었던 듯 싶어요.
이작품 설정이 요즘 상황으로도 패륜 소리 듣기 딱 좋은 설정인데 당시는 그나마
한부분만 떼어봤을 지라도 그다지 평범한 설정은 아니었던 게지요.

아무튼 얼마전에야 다섯권을 전부 봤는데 느낌은 참 가지가지 한다...-_-;;;
아이들은 무조건 사랑해 줘야해. 뭐 그런느낌?
할아버지와 그 며느리 가장 용서못해, 아버지 배신당한건 불쌍하지만 마사키한테 한짓은
정당화 될 수 없어. 마사키, 팔랑팔랑 생각없는 삶을 열심히는 살아가지만 딸래미한테 이상한
생각했던거 소름 끼치지만 니네집 내력 생각하면 생각으로만 그치고 스스로 자제한거
칭찬해줄게.(별걸다, 사실은 당연한 건데...), 다이고로가 좀만더 봐줄만하게 생겼어도 좋았을텐데...
쩝... 뭐 대충 그런생각들...

불륜 안좋아하는데 거기다 천륜까지 거스르는 내용이 많아 취향은 아니지만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좀 묘하게 기억에 남는 만화였어요. 순정만화에선 드물게 한 남자의 일생이
담겨 그런건가. 개인적으론 그래도 그나마 1,2권이 잼났던듯.
참, 그림은 맘에 들던데요. 그래도 중년 마사키, 너무 느끼해.ㅠㅠ


Posted by haleyeli
밑줄긋기2008. 12. 26. 14:14

-= IMAGE 1 =-

만화 좋아한다는 사람 치고 한때 이케다 리요코에 빠져 있지 않아본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그 사람은 무협만화만 보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야말로 심지가 아주 굳은
사람이거나 둘중 하나일 것이다. 그만큼 어린 가슴을 뒤흔들어 놓던 그 열풍이 대단했었다.

지금 보면 어딘지 촌스럽지만 그 당시엔 그리도 매끄럽고 유려하다 생각되던 그림체.
혁명의 한가운데에서 싹트는 사랑. 그 사랑을 방해하는 격동의 세월.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을 통해 이어지던 그 세월의 장구함에 나는 일찍이 사랑에 대한 환상을 접지 못했다.
나도 이런 사랑을 하고 싶어. 언젠간 할 수 있을거야 하던 그런 환상.
그러므로 멋도 모르고 종군기자를 꿈꿔본 적이 있을 정도니 보통 만화들을 보며 파생되는
웬만한 우연한 만남 같은건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뭔가 근사한 시대적 배경을 등에 업고
그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인간관계의 치졸함이 아닌 아무도 막을수 없는 혁명적인
요소들이 숨어 있어야만 했다. 그러니 엔간한 소개팅? 미팅? 얼어죽으라 그래라.

내 청춘은 만화 속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다 가버렸다. 문득 눈을 뜨고 현실을 직시해보니
사실 별로 높지도 않은 눈인데 사람들은 내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줄로만 알고 있었고 이젠
누구 소개 시켜준다는 사람도 없더라는 불쌍한 현실이 되어 버렸다. 얘들아, 나 별로 눈 안높아.
그냥 혁명만 하면 돼.^^ 아마도 사람 만나는걸 지극히 두려워 하는 폐쇄적 성격도 이때부터
굳혀지지 않았나 싶은데... 사람 만나는 것 보다 틀어밖혀서 글자 읽는 것만 좋았으니 말이다.
아아~~~ 만화가 멀쩡한 애 잡았다라고 한탄하는 동시에 그 배경 언저리에 깔려 있던 작가가
바로 이 이케다 리요코이다라는 사실...

"올훼스의 창 "이 후반부로 가면서 그림체도 바뀌고 엔딩도 미흡해서 이케다 리요코라는 작가가
"올훼스의 창 "을 그리던 도중에 병으로 죽었다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제자가 완성한 거라고...
그땐 당연히 그 소문이 진짜인줄 알았었다. 그런데 죽기는커녕 몇 년 전에는 50이 넘어서 음대엔가
를 들어갔다고 해서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그때 죽었던 거 아냐? 하고 놀랐던 기억이라니...

이 작가의 피는 아주 뜨거운가 보다. 자신의 작품에도 폭풍같은 사랑을 그려놓더니 단지 작품속에
등장시키는 것만으로는 모자랐나 보다. 은행 간부인 남편을 두고 여러 스캔들을 일으키더니 급기야
는 그 뭐랄까 ‘사랑의 도피’까지 했었다고... 그래서 만화계에서 멀어져 갔다고... 대부분은 대리만족
으로 그치고 마는데 이 정도쯤 되면 그 피는 뜨거운 것으로도 모자라 펄펄 끓는다고 해야 하지 않을
까.

지금에 와서는 한낱 추억이 되었지만 그래도 한때 이 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밤을 새웠던 적이
있었다. 그것은 소나기였다. 그렇게 퍼붓더니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쨍쨍해진다.
그래도 한때나마 내리던 소나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때는 옷 젓는줄 모르고 흠뻑
그 비를 맞았었다. 그게 최고인줄 알았다.


-이 글은 2002년 1월 24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Posted by haleyeli
밑줄긋기2008. 12. 26. 14:13

-= IMAGE 1 =-

아직 그의 많은 작품들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네코야마 미야오는 소년, 소년에서 이제 막
청년이 되어가는 시기의 청소년들을 그리기를 즐겨하는 것 같다. 거기다 마치 폭발할 것 같은
젊음을 지닌 그들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아주 섬세하고도 미묘하게 그러나 절대로 시선을 놓을
수 없도록 묘사해나가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는 시선을 포착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것은 그만큼 흡입력이 강하다는 뜻도 된다.
한번 그의 작품에 몰입하면 그 다음부터는 절대 눈을 떼지 못하게 하려는 듯이, 조금이라도
시선을 돌릴려 하면 머리채라도 잡아 채는듯한 느낌으로 한눈팔지 못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들의 눈빛 하나하나, 손끝 하나하나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섬세하고도 치밀하게 신경줄을
잡아끈다. 전형적인 순정체라고 할 수 있는 커다란 눈동자의 등장인물이 등장함에도 그것이
작품을 즐기는데 아무런 방해를 하지 않는다.

그의 등장인물들이 뭔가를 결심한 듯이 눈을 치켜 뜨며 정면을 응시할때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만큼 그 표정이 매력적이다. 아직 덜자란 아이같은 그들의 미성숙한 매력이 그토록 설득력을
가질수 있을줄 미처 몰랐다.

지금까지보다는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에덴으로 오라>는 도대체 왜 나올
생각을 안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본에서 연재가 안되고 있나. 제발 그 뒷권좀 내주~~~


-이 글은2002년 1월 24일에 적성된 글입니다.
Posted by haleye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