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면 그 사람은 무협만화만 보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야말로 심지가 아주 굳은
사람이거나 둘중 하나일 것이다. 그만큼 어린 가슴을 뒤흔들어 놓던 그 열풍이 대단했었다.
지금 보면 어딘지 촌스럽지만 그 당시엔 그리도 매끄럽고 유려하다 생각되던 그림체.
혁명의 한가운데에서 싹트는 사랑. 그 사랑을 방해하는 격동의 세월.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을 통해 이어지던 그 세월의 장구함에 나는 일찍이 사랑에 대한 환상을 접지 못했다.
나도 이런 사랑을 하고 싶어. 언젠간 할 수 있을거야 하던 그런 환상.
그러므로 멋도 모르고 종군기자를 꿈꿔본 적이 있을 정도니 보통 만화들을 보며 파생되는
웬만한 우연한 만남 같은건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뭔가 근사한 시대적 배경을 등에 업고
그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인간관계의 치졸함이 아닌 아무도 막을수 없는 혁명적인
요소들이 숨어 있어야만 했다. 그러니 엔간한 소개팅? 미팅? 얼어죽으라 그래라.
내 청춘은 만화 속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다 가버렸다. 문득 눈을 뜨고 현실을 직시해보니
사실 별로 높지도 않은 눈인데 사람들은 내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줄로만 알고 있었고 이젠
누구 소개 시켜준다는 사람도 없더라는 불쌍한 현실이 되어 버렸다. 얘들아, 나 별로 눈 안높아.
그냥 혁명만 하면 돼.^^ 아마도 사람 만나는걸 지극히 두려워 하는 폐쇄적 성격도 이때부터
굳혀지지 않았나 싶은데... 사람 만나는 것 보다 틀어밖혀서 글자 읽는 것만 좋았으니 말이다.
아아~~~ 만화가 멀쩡한 애 잡았다라고 한탄하는 동시에 그 배경 언저리에 깔려 있던 작가가
바로 이 이케다 리요코이다라는 사실...
"올훼스의 창 "이 후반부로 가면서 그림체도 바뀌고 엔딩도 미흡해서 이케다 리요코라는 작가가
"올훼스의 창 "을 그리던 도중에 병으로 죽었다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제자가 완성한 거라고...
그땐 당연히 그 소문이 진짜인줄 알았었다. 그런데 죽기는커녕 몇 년 전에는 50이 넘어서 음대엔가
를 들어갔다고 해서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그때 죽었던 거 아냐? 하고 놀랐던 기억이라니...
이 작가의 피는 아주 뜨거운가 보다. 자신의 작품에도 폭풍같은 사랑을 그려놓더니 단지 작품속에
등장시키는 것만으로는 모자랐나 보다. 은행 간부인 남편을 두고 여러 스캔들을 일으키더니 급기야
는 그 뭐랄까 ‘사랑의 도피’까지 했었다고... 그래서 만화계에서 멀어져 갔다고... 대부분은 대리만족
으로 그치고 마는데 이 정도쯤 되면 그 피는 뜨거운 것으로도 모자라 펄펄 끓는다고 해야 하지 않을
까.
지금에 와서는 한낱 추억이 되었지만 그래도 한때 이 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밤을 새웠던 적이
있었다. 그것은 소나기였다. 그렇게 퍼붓더니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쨍쨍해진다.
그래도 한때나마 내리던 소나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때는 옷 젓는줄 모르고 흠뻑
그 비를 맞았었다. 그게 최고인줄 알았다.
-이 글은 2002년 1월 24일에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