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2008. 6. 2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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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타 미나코의 작품을 생각해보면 언제나 정돈된 듯한 깔끔한 모습에 동작은 크지 않지만
여유로운 몸놀림으로 맑은 두눈을 가만히 들어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건 나리타 미나코에 대한 나의 이미지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세계이기도 하다.
그의 주인공들은 눈물 찔찔짜며 뒷걸음질치는 모습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과격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며 내달리는 모습은 없지만 정돈된 머리로 열심히 생각하며 해답을
얻어나가며 성장해 나가는 그런 모습들인 것이다. 또한 현실을 도피하려 눈을 감고 있는
모습도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도도하게 치켜뜬 눈도 아닌 그저 조용히 맑은 눈으로 담담하게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놓치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그럼으로써 주인공들을
성장시켜 나가는 그런 모습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주인공들은 성장만화에 무척 잘어울리는 캐릭터이다. 시대를 고민하지도 않고
우주를 오가지도 않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생각하고 고민하며 때로 우울하지만 그러나
음울하지 않게... <사이퍼>에서도 <알렉산드 라이트>에서도 그리고 <내추럴>에서도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는 그 느낌... 성장만화로써 그보다 더 좋은 이미지가 또 있을까. 어쩌면 그리도 현명할
수 있을까. 나이도 꽤 있는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아직도 그런 감각이 유지될수 있는 것일까.

그러니 그리도 고마울 수밖에... 한국의 중견작가들 중에 나를 안타깝게 하는 작가님들이 몇분
계시다. 그런데 나리타 미나코에게서는 적어도 지금 이시점에서는 그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고맙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가 작품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느낄수 없는 감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길 바란다.


-이 글은 2001년 8월 12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Posted by haleyeli
밑줄긋기2008. 6. 29.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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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특정분야를 파고드는 전문직 만화들이 꽤 많이 존재한다. 그런 만화들이 권수까지 길게
나왔다면 그건 꽤 볼만한 만화라는 말이 된다. 추리라는 것 역시 엄연한 한 장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명탐정 코난>역시 이런 범주에 속할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소년탐정 김전일>과 함께 일본
청소년 추리만화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는 코난은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까지 나올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유명한 고등학생 명탐정으로 이름을 날리던 구도 신이치는 모종의 사건에 휘말려 APTX 4869라는
이름의 약을 복용하게 되고 코난이라는 이름을 가진 초등학생의 몸으로 변해 버리고 만다.
물론 몸은 작아졌어도 명석했던 머리는 그대로 남아 여러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데 이때 대역이
되는 여자친구인 란의 아버지 모리 코고로는 이로 인해 잠자는 모리 탐정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물론 그건 코난이 모리를 마취총으로 잠재우고 목소리 변조기를 이용해 사건을 해결하는 것에 불과
했지만... 여기에 코난의 초등학생 친구들이 등장하고 여러 가지 쓸만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아가사
박사와 그 이상한 약의 개발자이며 역시 그 약의 복용후 몸이 작아진 하이바라.
관서지방의 명탐정으로 유명한 신이치의 라이벌 격인 하쯔토리와 그의 소꿉친구 카즈하가 등장해
이야기의 뼈대를 만들어간다.

철저한 조사와 스토리를 토대로 만들어지는 만화답게 그 많은 사건들이 등장함에도 꽤 볼만하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하도 많은 사건들을 보다보니 그 사건이 그 사건같은 느낌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 한꺼번에 많은 권수를 보기 보다는 몇권씩 잘라 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물론 이때 보게되는
마지막 권은 사건의 완결이 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다음에 그 다음편을 볼 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여졌었던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될테니까.

김전일과 코난이 아무리 다른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다른 추리물이라 해도 비교가 안될 수는 없다.
어째 그들은 나오는 권수까지 비슷하니까.(현재 김전일은 완결된 상태...) 물론 다른점은 있다.
일단 외향적인 모습을 보자면 어쨌건 코난의 주인공은 초등학생 꼬마이니까. 그리고 신이치는
김전일보다는 여자들에게 좀더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패션감각 역시 김전일보다는 코난이 훨씬
낫다. 그리고 또한 대부분이 밀실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는 김전일에 비해 사건의 유형이 더 다양하고
스토리도 비교적 더 짧은 편이다.
어떤 경우는 한권에 두세개의 사건이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으니까. 김전일은 반드시 살인사건이지만 코난의 경우는 살인사건이 아닌 경우도 있다. 물론 권수가 계속 진행되면서 거의 살인사건으로
변하기는 하지만. 마치 악마와 같은 인간 본성을 드러내는 김전일에 비해 분위기도 좀더 쾌활하고
밝다. 또한 김전일은 사건들 사이의 연관성이 없지만 코난은 가끔씩이나마 사건들이 연관된다.
어쨌거나 신이치와 하이바라가 그렇게 된 배경과 비밀은 풀어야 할 것이 아닌가 말이다.
어쨌건 둘은 뗄레야 뗄수없이 김전일 하면 코난, 코난하면 김전일 하는 식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다행히 어느 하나가 나머지 하나에 완전히 묻혀버리는 우를 범하지는 않는 듯 싶다.
그건 정말 행운이 아닐수 없다. 독자의 입장에서야 선택의 폭이 넓어질수록 좋은 것이니까.

물론 여기서 몇가지 생각은 하지 말기로 하자. 어떻게 사람들이 잠자며 추리하는 모리 탐정의 모습
을 의심하지 않고 지나칠수 있는지, 비상한 머리로 범죄를 저지르는 범인들이 어떻게 모리의 상태와
그 뒤에서 추리하는 코난을 눈치 못챌수 있는지, 갑자기 튀어나온 코난이란 존재가 어떻게 의심받지
도 않고 학교까지 다닐수 있는지, 어떻게 그렇게 가는 곳마다 사건이 벌어지는지, 어떻게 하다못해 가끔씩은 소노코가 모리탐정 대신이 될 수 있는지, 왜 모리나 소노코 본인들은 자신이 어떻게 사건
을 해결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하지도 않는지, 신이치의 특별한 이유없는 오랜 부재가 어떻게 그렇게 이해될수 있는지, 물론 가끔씩 란이 의심을 하기는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의심일뿐
별일이 아니게 되고 만다.

이런 것들을 일일이 따져가며 생각하다 보면 만화의 재미를 충분히 느낄수 없게 된다.
적어도 코난에서 그런 사실은 서로서로가 눈감아주고 지나가는 장치가 아닌가 한다.
그런 장치가 없다면 도대체가 스토리를 이어 나갈수가 없을테니까...
완결을 애타게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만화. 영원히 네버엔딩 스토리가 되어도 상관없을 것 같은
만화. 흐음, 그것이 코난이다.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다. 몇 년에 한번씩 몇권씩 나와있는
코난을 집어드는 재미가 꽤 쏠쏠하기 때문이다. 재미가 없다면 절대로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이 글은 2001년에 작성된 글입니다.


추신,개인적으로는 코난이 그이 꼬맹이 친구들과 벌이는 사건들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오히려 성인들보단 이 꼬맹이들이 내겐 더 어필하는데 하이바라가 꽤나 맘에 들어서이기도 하다.
2005년 현재 47권까진가 나와있는 부분을 읽고 내용을 추가하다.
Posted by haleyeli
밑줄긋기2008. 6. 29.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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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올드 데이스"는 논픽션이고 크게 세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첫번째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인 김필순의 이야기, 두번째 그의 아들이자
중국에서 영화 황제의 삶을 살았던 김염의 이야기, 세번째 저자 박규원이
자신의 증조 할아버지인 김필순과 작은 외할아버지인 김염의 삶을
추적해 나가는 이야기다.

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다큐성이 가미된 까닭에 비교적 감정선이
크게 부각되지 않아 읽기에 부담이 없었다. 이렇게 역동적이고
역사적이랄 수도 있는 이야기가 소설로 쓰여졌다면 아마 나같은 사람은
읽기를 포기하거나 닭살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기분을 감출수가
없었을 것이다.

저자 박규원의 외가는 그 집안의 역사가 곧 한국 독립 운동사의 역사라
할 정도로 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집안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역사의 시발점에 서있던 사람이 김필순이지만 그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그동안 알려지지 않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들인 김염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영화황제라 불릴 정도로
성공한 배우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그동안 중국과의 관계 때문인지
국내에선 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몇년전엔가 어떤 잡지에서
그사람 기사를 읽었던 기억은 나는데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 책을
읽으며 그나마 기억이 났다.

박규원 집안의 제보로 김염의 이야기는 KBS에서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지기도 했는데 집안의 다른 사람들은 이 정도면 됐다고 만족하지만
오히려 박규원은 이때부터 집안 어른들의 일대기를 추적해 나가기 시작한다.
8년여동안 중국, 미국등을 돌아다니며 할아버지들의 역사를 추적해 나갔고
이 과정에서 건강이 나빠지기도 하고 집안 사람들의 몰이해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 자신도 모를 집념과 열정으로 결국 이 책을 탄생시킨다.

김필순 집안의 자식들은 모두 그 당시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들었던
교육의 혜택을 누렸다. 그것은 확실히 혜택이었지만 그 대가로 그들은
중국, 미국, 남,북한에서 제각기 분리된 삶을 살아야 했다.
중국에 남아있던 김염은 말년이 되어서야 형제들과 간신히 연락이 가능했고
한국의 형제는 미국을 통해서 중국의 형제와 3자 편지를 주고 받아야 했다.
동생은 형 김염이 보낸 편지를 읽을 기력이 안돼 품에 품고만 있다가
세상을 떠났고(누가 읽어 주었을 수는 있다) 중국의 김염이 죽은뒤 그의
책상 서랍에서 동생이 보내준 돈 200달러가 고스란히 발견되었다.
북한으로 떠난 동생은 생사도 알 수 없다.

그 모든것이 하나의 인생이며 소중한 인생이다.
당사자들은 역동적으로 그 시대를 살았고 행복했을지 모르나 정작
글로서 그들의 행적을 읽는 나는 솔직히 눈물이 난다.
그들의 화려했던 시기보다 말년의 행적에 더 관심을 가지며 그 이면을
생각하는 나는 확실히 마이너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_-;;;

"상하이 올드 데이스"의 문체는 프로작가가 쓴것이 아닌만큼 평범하고 쉽다.
그러나 혈족에 관한 것인만큼 뭐랄까 절절한 애정이 배어난다.
사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그 시대에 관한 진지한 고찰이나 비판, 혹은
주인공들의 생에 대한 이면등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그런것들을 알기 위해서라면 아마도 역사책을 뒤져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그들의 한 손녀가 오로지 조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만으로
스스로의 발품을 팔아가며 지극히 사랑을 담아 헌정한 책이다.
당연히 감탄과 찬사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한계가 엄연히 존재한다.

이 책은 또한 저자 박규원의 자신찾기로의 여행이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넉넉한 집안의 중년의 평범한 한 주부, 아들 하나를 키워 유학 보냈고
서서히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되짚어 보기 시작한 시기에 만난 매력적인
두 인물의 생애에 빠져들면서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도 의미를 키웠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 글은 8/8/05년에 쓰여진 글입니다.

Posted by haleyeli
밑줄긋기2008. 6. 29.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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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토토를 처음 읽은건 3년전 쯤이다.
감상문을 쓰기 위해 오늘 앞부분을 조금 다시 읽어보고
느낀점은 매우 사랑스럽고 예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내게 잘 맞는
얘기는 아니라는 것...

사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파파 톨드 미"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잔잔하고 예쁘고 아름답지만 박제되고 정형화된 서양인형을
보는것과 같은 느낌...
"창가의 토토"는 물론 박제되고 정형화된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통통 튀어오르다 못해 뭔가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이
묻어난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이런 아이의 열정과 상상을 이해해주고
북돋아 줄 수 있는 도모에 학원의 교장 선생님과 같은 인물은
못된다. 아마도 내 주변에 이런 아이가 있다면 나역시
토토가 처음 다녔던 학교의 선생님과 같은 반응을 보였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또하나 토토는 매우 운이 좋은 아이다.
약간은 특이하달 수 있는 토토의 세계를 적극 이해해주지는
못할망정 배척하지는 않는 좋은 부모를 두었고 자신의
얘기를 재밌게 들어줄 수 있는 선생님을 만났으며
무엇보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태평양 전쟁중이던 때로
기억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어린 아이들이
꿈과 희망을 펼치기는 커녕 당장 먹을것이 없어 굶어죽고
고아가 되어 떠돌아 다니던 때다.
그런데 토토는 유쾌한 일상을 살 수 있었단 얘기다.
동심이 멍들지 않은채로 말이다.

흠, 쓰다보니 어째 비판만 한 생각이 드는데 사실 나는
이 책을 매우 즐겁게 읽었다. 다음편인 "토토의 새로운 세상" 도
가지고 있다. 어쩌다보니 사논지 2년이 지난채로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나는 토토를 마냥 부러워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에 들어간지 단 일주일만에 나는 수업시간과 쉬는시간이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학교가 폭파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고, 학교가니 좋냐는 어른들의 연달은 질문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그렇다고 말하며 속으로는 울상을 짓기도 했다.
내 주위의 어른들 역시 매우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나는 어린아이의
세계를 이해하는 어른이나 혹은 적어도 재밌게 대화를 나눌수 있는
친구조차도 찾질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러니 내가 토토를 부러워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것이 논픽션이라니 더욱 그렇게 감정이입이 될 수밖에...


                                                -이 글은 8/8/05년에 쓰여진 글입니다.

Posted by haleyeli
밑줄긋기2008. 6. 29.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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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한국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일관적이지 못하다. 지나치게 부풀려 지거나
밑도 끝도 없이 격하되기 마련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역사를 좋아하거나 특히 고대사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행위를 국수적이다, 혹은 고리타분하다 라고 인식되기까지 한다.
글로 쓰여져 있는 기록은 각각 그 사실을 바라보는 시각에 의해 다른 해석을 가질수
있으며 각자의 정치적 목적에 맞추어 윤색되기도 한다.
특히 한,중,일 3국의 고대사에 관한 인식은 현재까지도 첨예한 논쟁과 관심의 대상이 된다.

나는 역사를 매우 좋아하며 오랜 세월동안 역사학자가 꿈이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은 허탈해진다. 찬란했던 고대가, 혹은 수치스러웠던 역사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역사가 중요하긴 한가벼.. 생각할수 밖에 없게 되는것이
고대사를 가지고 왈가왈부 하는것이 한국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 일본등에서 역시 수도없이 되뇌어지는 고대사. 워낙 사료가 불분명한 탓에
바라보는 시선에 의해 얼마든지 자국에 유리하게 각색되어 질 수 있는 역사.
나역시 한국인인 까닭에, 또한 한자를 읽지 못하는 까닭에, 한국말로 씌여져 있는
한국사를 읽으며 한국에 유리하게 해석되어지는 역사를 읽어왔음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내가 알고있는 사실들 역시 얼마나 진실인 것일까.
나름대로 객관성을 가지고 역사를 바라봐 왔다고 자위하면서도 오랜세월 나는 그런
의문을 떨치지 못했다. 그건 지금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발굴되어지는 유물들과 기록의 흔적들을 통해 나는 조금씩
부족한 역사관을 확립해 나가고 있다. 적어도 중국기록들에 의해 보여지는 한국은
꽤 많이 윤색되어 있음이 틀림없는듯 싶다. 그 대표적인 예가 풍납토성의 발굴이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비친 백제는 서기3,4세기 경까지 변변한 성곽도 없는 초기국가였다.
그런데 1995년(맞나?)에 한성백제의 왕성(으로 추정되어지는) 풍납토성이 발굴되었고
탄소연대 측정을 통해 풍납토성이 이미 2,3세기 경에 완료되었음이 밝혀졌다.
풍납토성은 기존의 학설을 뒤엎을 만큼 거대한 규모였고 그 시기 거대한 성곽이 지어졌다면
국가의 확립은 그보다도 전일 것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풍납토성은 엄청난 수의 인원이
(백만명이라고 어디선가 읽었던듯 싶은데 출처가 기억나지 않는 관계로...)
동원되야 했던 대공사라고 한다. 그런 인원을 동원시킬수 있는 정치세력이 이미 그당시
백제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 믿기 힘든 이야기들을 믿을수 밖에 없는것이 탄소연대 측정이라는 과학적 방법이다.
내가 과학에는 문외한이니 자세한 사항은 잘 알 수 없다만 결과적으로만 말하자면 탄소연대
측정은 유물, 유적의 조성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며 그 오차범위를
감안하더라도 꽤 믿을수 있는 과학적 근거라는 것이다.
실증, 합리성을 운운하며 이미 드러난 사실도 믿을수 없다며 침묵하거나 오히려 매도되는
역사학계의 편협성을 꽤 적절하게 침묵시킬 수 있는 무기인 것이다.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라는 책을 소개하려 이 긴 사설을 써내려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은 한국 고대사에 등장한 일식등의 기록을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발생유무를 가려낸다.
그 결과 한국측 기록의 80%, 중국측은 75%, 일본측 기록은 35%의 일식이 진짜로 발생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삼국사기등에 등장하는 일식기록이 모두 날조된 것이거나
중국측 기록을 베낀 것이라는 관측이 이로써 빗나간다. 오히려 중국측 기록보다 정확성이
높으며 중국의 기록들이 제각기 분산된 장소에서 일어난 사실의 기록인 반면(꾸준히 관측을
할만큼 통일된 정권이 오랫동안 유지되지 못했고 어디에서 일어났다더라 하는 식으로
후일 기록된 것이 많아서라고 한다) 삼국의 기록은 오랜 세월동안 동일한 장소에서 꾸준히
관측되어진 결과물이다. 일본의 경우는 언급할 가치도 없는것이 35%의 정확성은 그렇다 치고
그나마도 동남아등에서 이루어진, 절대로 일본땅에서 나타날 수가 없는 기록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저기서 가져다 기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할 수 있겠다.

삼국의 일식기록을 측정한 결과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 발견되는데 백제와 신라의 경우
일식의 최적관측지가 모두 중국대륙 동부에 존재한다. 저자인 박창범 교수가 뭔가 오류가
있나 의구심에 고려, 조선, 중국의 기록들까지 면밀히 조사했지만 모두 확실했던 반면
백제와 신라의 경우만 예상과 달랐다 한다. 백제는 그나마 대륙백세절이라도 존재하니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있지만 신라의 경우는 스스로도 의문점이 많으며 이것은
역사학자들이 풀어낼 숙제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은 2002년에 출판되었고 박창범 교수는 이미 90년대 중반 이 연구결과를 학계에
발표한 적이 있다. 이러한 과학적 사실을 접한 학계의 반응은 많은 격려를 받았다고는
적고 있지만 앞뒤전후를 살펴볼때 뜨뜻 미지근했던 듯 싶다.
글쎄, 별로 연구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나 보다.

일하면서 종종 방송국의 지나간 동영상들을 듣곤 하는데 얼마전에 KBS의 TV 책을 말하다
라는 프로그램에 이 책이 등장한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냉큼 들었던 적이 있다.
반가운 마음으로 그 동영상을 듣던 나는 매우 답답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그 프로그램에는 저자인 박창범 교수와 다른 역사학자(이름을 모르겠네요) 한분이
참석했는데 그 역사학자는 계속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은 중국의 것을 베꼈을 확률이
높으며 그 연구의 결과를 믿을수 없다는 식의 주장을 펼쳤다.
박창범 교수에게 중국이나 다른쪽의 기록까지 모두 살핀것이 맞느냐는 질문을 하기까지 했다.
저자는 이에 대해 당연히 모두 했으며 그런것을 묻는것은 자신에게 네 할일을 제대로
했느냐고 묻는것과 마찬가지라고 대답했다.
한시간짜리 토론이었으므로 내 정리에도 약간의 각색이 있을수는 있겠지만 요점은 이러했다.
박창범 교수는 자신은 단지 과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고대의 천문학적 기록을 관측했을 뿐이며
그 결과를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은 역사학계가 할 일이다.
면밀히 연구한 결과 근거가 없다면 모르되 단지 드러난 관측결과만을 가지고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느냐 물을수는 없다.

근데 역사학계에선 그렇게 하는가 보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느냐고. 이건 말이 안된다고.
아니 글쎄, 말이 되느냐 안되느냐는 연구해 봐야 알 일이잖아?
자신들이 아는것과 다르다고 말이 안된다고 하는것이 말이 되는 일이냐고...-_-;;;
박창범 교수가 그러더라. 그 연구결과에 오차가 발생할 확륙은 0.몇 퍼센트라고...

몇달전 그동안 우리가 배워왔던 지리적 상식들이 모두 어처구니 없을정도로 오류
투성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해방 50년이 지나도록 면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채 일본인들의 연구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해 왔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도 지리는 눈에 그대로 보이는 것이다.
조금만 신경쓰고 인공위성만 제대로 돌려도 알 수 있을 사실들이 무관심과 학계의 이익에
걸려 방치되어 왔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이었다.
그런데 역사는 이미 우리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이다. 몇줄의 기록과 몇개의 유적만
가지고 모든것을 판단해야 한다. 그런 행위들이 단순히 과거를 좋아하는 자들의 취미생활
이라고만 받아들여지기엔 저 옆나라 들에서 그 과거에 쏟아붇는 행위가 너무나 버겁다.
고천문학만 해도 저 멀리 서양까지 갈것도 없이 중국, 일본에서는 이미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한 천문학자가 이해관계 없이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에
연구한 결과물이 박대를 당하다 못해 사장되어지고 오히려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눈초리까지 받고 있다.

우리끼리 그러다 말면 상관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두려운 것은 어느날 아무것도 모른채
당할수 있다는 것이다. 고천문학? 그게 뭐야? 하는 사이에 마구마구 들이밀어지는 자료들에
의해 정신없이 당할수도 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일식기록 역시 이미 고천문학을 앞서
연구하고 있던 중국과 일본측에 의해 중국것을 베낀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고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던 상태라고 했다니 말이다.

나는 국수주의자도 아니고 민족의 위대한 기상 어쩌고 운운에는 두드러기가 돋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진실이 가려지고 왜곡된채 조작까지 당하는건 싫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그 연구의 결과가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그래서 받아들이기 힘들더라도
그것이 후회없이 공부한 결과라면 어쩔 수 없다.
우리의 고대사가 우리 생각만큼 자랑스럽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깍여지고 조작되는 것은 싫다. 그것은 직업윤리에도 어긋난다.

풍납토성 발굴의 일등공신인 이형구 교수는 발굴전 학계에서 이단아 취급을 당했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이형구 얘기가 나오면 '그 사람이 누구지요?' 하며 무시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조유전의 <한국사 미스터리>에서 발췌)

적어도 그런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소박한 바램이다.
내가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중에 진실이 아닌것이 얼마나 될 것이며 또한 내가
모르는 진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진실은 과연 저 너머에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그럴수 없다고 말하고 싶고 또한 믿고 싶다.



                                                -이 글은 7/4/05년에 쓰여진 글입니다.
Posted by haleyeli
밑줄긋기2008. 6. 2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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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한승희 작가님. 그린체가 나날이 수려해 지십니다.
정말 감격을 금할길이 없습니다. 흑흑흑...ㅠㅠ

한승희 작가가 그림을, 전진석 작가가 스토리를 맡아
공동작업을 시작했다. 한승희 작가님의 스토리 능력 역시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듯 싶다.
그러나 이 시도는 현재까지는 매우 성공적이라고 보여진다.
스토리 작가가 남자라길래 매우 우려한 바 없지 않지만
현재까지의(2권까지)의 진행으로 보건데 그분의 스토리는
내가 남성작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인 숭숭거림이 없다.
1권 투란도트 부분에서는 일말의 서걱거림이 눈에 띄었지만
2권 처용 부분에 와서는 아무래도 내나라 이야기인지 감정이입이
쉽게 되더군. 역시 문제는 성별이 아니라 감수성이었던 게지.
'제2의 성'. 이말이 명언인가 보다.
사실 2권 읽을때 순간 천일야화에 진짜 신라이야기가
들어있던가 헷갈림이 왔지만 처용 나올때 아, 이것이 역시
'황홀한 삽질'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지...^^

천일야화는 흔히들 아라비안 나이트로 많이들 알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알라딘의 요술램프
등등이 그 이야기의 일부분이다. 근데 나도 이번에 전진석 작가의
후기를 보고 알게 되었는데 천일야화에서 제일 유명한 저 두 스토리가
원래의 원전에는 없는 이야기라매? 서양으로 번역하던 갈렝 아저씨가
만들어낸 이야기라네. 우째 이런일이, 털썩... 오티엘..

사실 중간중간 각각의 스토리 외에 천일야화 전부를 읽어본 적은
아직 없다. 워낙 잡식성으로 헤매고 읽고다니는 터라 스스로도
의외이기는 한데 한번 읽어볼만 하겠다 싶으면서도 망설여지는
대표적인 작품중의 하나가 바로 이 천일야화다.
도대체가 이야기의 시작부터가 매일밤 처녀들을 죽여대는 왕에게서
살아남으려는 여인네의 '처절한 몸부림'이라는 데야 도저히...-_-;;;
이슬람 문명권은 매우 매력적이긴 하나 현대인의 시각으로, 특히
여성의 입장에서 볼때 어색한 부분이 있는것도 사실이다.
아, 이슬람 사원을 비롯한 이슬람 문화 자체에는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

뭐 어쨌건 그런 의미에서 전진석 작가의 스토리가 원전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고 해도 그닥 거부감은 없다. 원작 자체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매력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실 원작 그래로 갔더라면 읽혀지기 상당히 힘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나같이 불평불만 많고 주는것 없이 원하는 것만 많은
독자에게는 말이다.

자, 아무래도 여장변태(?) 세하라자드와 서늘한 눈매의 국왕전하,
안경잽이 시니컬 보이 자파르에 관한 호기심은 계속될 듯 싶다.
그런데 책 한권에 이야기 하나씩이라니 도대체 이것이 몇권까지
지속될 것인가. 그것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진진할듯.

그리고 여담 하나. 자파르의 안경에는 다리가 없다.
공중에 붕~~ 떠있다. 푸하하하~~^^


                                                     -이 글은 4/3/05년에 쓰여진 글입니다.

Posted by haleyeli
밑줄긋기2008. 6. 29.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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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 많은 기대를 가졌던 탓일까.
'더칸' 1권을 막 읽고난 후의 감정은 '당혹' 이다.
그림이 많이 뭉개진듯 보이고 내용은 구멍이 숭숭 뚫렸다.
'소년별곡'과 'M & M' 당시의 그림을 유지했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으니 사실은 지금의 그림체가 본래의 그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한때 수려한 그림체에 매료되었던 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비슷하되 왠지 둔하고 한층 뭉개진 그림을 대하는
마음이 착잡하기 이를데 없다.

내용면에 있어서도 김은희 작가님은 나를 매우 당혹시키는
작가님중의 하난데 'M & M'을 읽은후 무턱된 기대감으로 읽었던
'Guyz'(맞나?)로 인해 첫번째 당혹감을 맛봐야 했고 '소년별곡'
이후 다시 회복된 신뢰감으로 집어든 '스트릿 제너레이션'이나
'히치하이킹에 관한 찬반양론'은 내게 다시금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제목은 무척 멋있는데...-_-

나는 내가 매우 김은희 작가님을 좋아하는줄 알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작가님의 여러작품중 내게 맞는 작품은 'M & M'과
'소년별곡'밖에 없었으니 그 두 작품의 영향력이 매우 컸었나 보다.
또한 그 여러작품중 야오이적인 요소가 포함된 작품은 'M & M'밖에
없었음에도 김은희님에 대한 가장 강력했던 인상이 멋진 남자들...
이었으니 'M & M'의 파장이 크기는 컸었나 보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니 'M & M'의 완결을 보기는 어려울 듯 싶다.
작가님은 매우 정상적인(?) 세계로 돌아오셨으니 그때 당시의
감수성을 되살려내기 어려울 것이고 억지로 그렇게 된다 한들
다시 당황해야 할 듯 싶어서 말이다...-_-;;;

그 모든것을 차치하고 김은희 작가님은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M & M'을 읽으면서 어딘가 허전했지만 결국은 그것을 잊어버리고
그 작품을 꽤나 좋아하게 되었고 '소년별곡' 역시 읽었던 당시보다는
그후에도 몇번을 되읽어가면서 새록새록 재미를 느낀다.
그런데 다른 작품들에는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으니 안타깝다.
읽으면서 너무 당황했던 터라 차마 다시 집어들 용기가 없다.ㅠㅠ

그러고보니 이 지면은 '더칸'을 위한 공간인데...

김은희님이 새로운 작품을 시작하셨고 그 작품의 내용이 내가 무척
좋아하는 역사에 관한 것이라기에 나는 대뜸 '비천무' 정도의 역사물을
생각해 버렸고 그 그림으로 그 의상들이 얼마나 멋있을 것이며
그 동안의 당황은 이번에 감동하기 위한 준비기간이었던 것이야 등등등
내멋대로 이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당황하게 되었음에 한탄할 뿐이다. 쩝...
그 남자들의 매력이 아직 제대로 꽂히지 못했고 워낙 방대한
스케일이다 보니 숭숭 지나가 버리는 부분이 많았다.
작가님이 의욕이 넘치되 스스로 부담을 느끼는 부분이 많이 있으신듯 싶다.

허나 아직은 초입일 뿐이니 처음의 정신없음이 차츰 정리되고 뼈대가
잡히면 뒷심을 과시하는 내공을 발산하시게 되길 빌어본다.
어려운 장르를 택한 작가님의 열정과 배짱이 눈에 훤하고 또한 또 하나의
'당황스런' 작품으로 기억되기에는 그 소재와 캐릭터가 너무 아깝다.


                                                              -이 글은 4/3/05년에 쓰여진 글입니다.
Posted by haleyeli
밑줄긋기2008. 6. 2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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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쿨 시절 상당히 좋아했던 영화다.
사실 말이 자극적이지 않아서 그 블라블라들을
다 이해하고 본건 아니었는데 순간순간의 대사들과
이미지가 너무 좋았다.
브래트 피트는 이 영화후 "interview with the vampire"와
"Legend of the Fall"을 통해 만개하기 시작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시절의 그를 가장 좋아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풍경이 너무 좋다.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
막상 살아보면 지루할 거라고들 하는데 글쎄 나는
워낙에 도시의 번잡스러움과 와글와글한 사람들을
싫어하는 터라 그리 지루할듯 싶지는 않다.
다만 인터넷은 있으면 좋겠고 책은 필수다.
그것만 있으면 조용하게, 평생을 이렇게 조용하게
혼자서 살아가는 것도 참 행복하겠다.

                                                                                             -8/24/2004

Posted by haleyeli
밑줄긋기2008. 6. 29.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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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퍼왔지만 내 잡생각이 많이 들어갔으므로 이 방에 끄적끄적...

이 영화는 주관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상당히 재밌는 얘기였는데
취향의 차이인지 내게는 사랑의 탈을 쓴 야오이 영화로 느껴지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부분을 상당히 싫어한다. 왜 그들이 죽어야 했나?
단지 이번 생에 남자와 남자로 만났기 때문에?
모든걸 감수하고, 또한 포기하고 뉴질랜드(호주인가?)로 날아갈
만한 용기였으면 그 용기와 열정으로 끝까지 살아보이겠다.
서로가 서로에게 질려 후회할 지라도 그것조차 일상으로 잔잔하게 받아들여질때까지.
작가가 너무 번지점프라는 제목에 매달려 말 그대로 번지점프를 시키기 위해 지나치게
삽질을 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차라리 절벽에 서있는 것으로 끝났다면
관객들에게 상상의 여지를 남겨주며 더 여운이 남았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수 없다.

사족, 개인적으로는 이은주가 나왔던 부분은 너무 상투적이어서 지루해 하는
편이다. 여현수가 나왔던 후반부가 묘한 매력이 있는것이 거 참 필 땡기더군.
근데 이은주는 이때 참 예뻣다. 원래 이 친구 얼굴이 내 취향이라 지금도
좋아하기는 하는데 세월이 갈수록 목소리가 너무 거슬리는 것이 아마도
얼굴부분의 점수마저도 깍아먹은듯... <불새>에는 안나왔으면 좋았다는 생각이다.
첨에 2회까진가(비디오로 2회니까 실질적으로는 4회) 보다가 너무 지루해서
안봤는데 아무리 좋아해도 좋아한단 이유만으로 당신의 모든걸 챙겨볼 수는 없다.
김희선 얼굴을 보고 좋아했지만 비천무 보고 너무 깨서 그동안의 애정을
거둬들였던 것처럼 뭐 <불새>도 그지경 될까봐 아예 안봤지만...


                            -이 글은 8/24/2004년에 쓰여진 글입니다.
Posted by haleyeli
밑줄긋기2008. 6. 29.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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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피를 바쳐 신시대 메이지를 열고 역사너머로 사라져간다.
다시는 살생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남긴 역날검을 차고 방황하는 나그네가 되어 길을 떠난다.
서른이 다된 나이에 말도 안되게 어린 얼굴을 하고서 신기어린 칼솜씨를 자랑하는 남자.
철저히 자신을 감추며 세상에게 나 건들지 마라 광고하는 다니는 듯한 이사람.
그러나 정작 본인은 당면하는 모든일에 시시콜콜히 참견해야 직성이 풀리는 듯한 웃긴
이남자 히무라 켄신. 그리고 또 다른 이름, 히무라 발도제.

처음엔 이게 그리도 유명한 작품인지를 모르고서 봤다. 5번까지 나와있던걸
아무생각 없이 들고 왔다가(웃기게도 이게 순정만화 코너에 꽂혀 있었다...)
상당히 재밌길래 나오는 족족 빌려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주인공보다 그 주위의
조연들이 상당히도 매력적이었으니 아마도 원체가 조연 좋아하는 체질을 타고난
나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순 없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건방진 꼬마 야히꼬, 등뒤에 '악'자를 써붙이고 다니는 싸움꾼 사노스케, 오기밖에
안남은 어정번중 아오시, 그리고 무엇보다 발도제와 함께 메이지 이전을 누빈 남자.
신선조 사이토 하지메. 메이지를 반대하는 신선조의 조장이었으면서도 엉뚱하게
신시대 메이지의 경찰이 되어있는 남자. 그러나 자신은 어떤 단체를 위해서가 아닌
오로지 시대의 안정을 추구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변절에 대한 일말의 죄의식도
없는 남자. 그토록이나 당당하여 그 싸가지 없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그를
비난하게 만들수도 없는 남자.

장편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켄신에게 도전해오는 많은 인물들의 당위성이나
캐릭터에도 세심한 배려를 빼놓지 않은 작가의 열정 덕분에 그 많은 인물들 하나하나를
곱씹어 나갈수 있었다. 글쎄, 내가 그 시절을 살지 않은 이상 어찌 그들을 일일이
이해한다고 말할수 있겠느냐마는 적어도 니들이 시대의 실패자는 아니었다라는 뭐 그런 생각...

다만 연재분이 길었고 워낙 동작이 큰 작품이었던 나머지 나중으로 가면 갈수록
내용 연결을 하는데 애를 먹어야 했다. 일단 번역되어 나오며 중간에 몇권이 빠지고
그 뒷편부터 나왔기 때문에 일차적인 상황설정이 부드럽게 연결되지가 못했고 한창
싸우다 끊기고 몇 달이 지난후에 다음 편을 보면 에에... 이게 전에 어땠더라 하는
생각 때문에 작품에 집중하지 못하다가 좀 익숙해질 만하면 다시 끊기곤 하는
리듬 때문에 애를 먹고는 했다. 하긴 그런 작품이 어찌 <바람의 검심> 하나일 까마는...

거기다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지나치게 비약적으로 커지는 스케일은 이거 드래곤 볼이야?
하는 우려를 지우지 못하게 했다. 특히나 도쿄편에 오면 갑자기 감당할수 없을 지경이
되어 버리는데 작가 스스로도 이 정도가 될줄은 몰랐다고 후기에선가 읽은적이 있다.
어쨌거나 일본만화 특유의 토너먼트식 대결은 여기에서도 유감없이 그 장기를 발휘하여
본인들이 1대1로 싸우면 그들이야 죽건말건 옆에 늘어선 사람들의 관전평까지 어찌
그리도 토너먼트식 대결의 특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는지...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한 것인만큼 역사에 대한 부분도 빼놓을 수가 없겠지.
그들의 메이지 시대는 우리에겐 불행의 시기였다. 개혁을 하고 혼란을 정비한 뒤
그들은 우리를 노리기 시작했으니까. 그 시절이 우리에겐 어떤 시기였나.
철종? 고종? 명성황후의 등장 전이었나? 우리는 그때 뭐하고 있었나.
강화도령 모셔다가 지 편들끼리 세력 갈라먹고, 벼슬팔고... 그리고 또?
형편 무인지경으로 왕위다툼 벌이다가 지들끼리 치고 박고...
불행을 자초한건 우리의 뼈저린 실책이었다. 그러면? 남의 나라 갉아먹으며
지들만 정당화 했던것도 우리가 어리석었기 때문인가?

뭐 어쨌건 만화는 만화 그 자체로만 보아야 한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진리다.
그러므로 갑작스레 등장한 새로운 시대에 당황하며 어리둥절했던 그들을 폄하할
맘은 없다. 몇백년을 이어져 오던 사무라이의 전통인데 어느날 갑자기 칼을
빼앗기고 평범하게 살라면 얼마나 당황스러울지도 이해하지 못할 맘은 없다.
몇백년을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 그들의 정신마저 그리 박혀버렸을 터인데
새로운 검의 성능을 시험한다고 길가던 아이를 베어 죽여도 감히 사무라이에겐
반항하지 못했던 자랑스런(?) 그들의 역사인데 이젠 진검을 버리고 목검이나
휘두르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설령 그칼이 우리 목끝을 졸랐다해도 말이다.

아마도 내가 첨부터 끝까지 같은 마음으로 <바람의 검심>을 편하게 보지 못했던
이유는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가장 촌스럽게도 만화에 현실을 직시해서 본 이 나의
어리석음이 그들이 아무리 멋있게 칼을 휘둘러대도 그것이 묘한 답답함이 되어
내 목을 조른 것이다. 불과 몇십년 후의 그들의 역사를 알고 있기에 말이다.
더구나 만화의 내용만 보자면 그 시대에 환상을 가지고 보기에 충분한 것을...
적어도 세도정치에나 시달리고 있던 내 땅보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바람의 검심>은 내게 상당히 재미있었지만 그다지 유쾌하지는 못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 그 이유를 순전히 작품 안에서만 찾으라고 해도 지나친 비약이나
확대, 토너먼트식 대결구조 등등의 허술하지 않은 몇가지 당당한 이유가 있지만
누군가 순전히 지역감정(?) 때문이라고만 몰아 붙인대도 그다지 반항할 맘은 없다.
어쨌거나 작품을 완전히 몰입해서 읽으려면 작품을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는 소린데
메이지라는 시대 배경은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프랑스 혁명 보다도 내게 이해할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지 않았다. 또한 이해하려는 의지또한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나는 '그들'이 아니며 '그들'이 될맘도 없으니까...


이 글은 8/11/01에 쓰여진 글입니다.
Posted by haleye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