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살생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남긴 역날검을 차고 방황하는 나그네가 되어 길을 떠난다.
서른이 다된 나이에 말도 안되게 어린 얼굴을 하고서 신기어린 칼솜씨를 자랑하는 남자.
철저히 자신을 감추며 세상에게 나 건들지 마라 광고하는 다니는 듯한 이사람.
그러나 정작 본인은 당면하는 모든일에 시시콜콜히 참견해야 직성이 풀리는 듯한 웃긴
이남자 히무라 켄신. 그리고 또 다른 이름, 히무라 발도제.
처음엔 이게 그리도 유명한 작품인지를 모르고서 봤다. 5번까지 나와있던걸
아무생각 없이 들고 왔다가(웃기게도 이게 순정만화 코너에 꽂혀 있었다...)
상당히 재밌길래 나오는 족족 빌려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주인공보다 그 주위의
조연들이 상당히도 매력적이었으니 아마도 원체가 조연 좋아하는 체질을 타고난
나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순 없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건방진 꼬마 야히꼬, 등뒤에 '악'자를 써붙이고 다니는 싸움꾼 사노스케, 오기밖에
안남은 어정번중 아오시, 그리고 무엇보다 발도제와 함께 메이지 이전을 누빈 남자.
신선조 사이토 하지메. 메이지를 반대하는 신선조의 조장이었으면서도 엉뚱하게
신시대 메이지의 경찰이 되어있는 남자. 그러나 자신은 어떤 단체를 위해서가 아닌
오로지 시대의 안정을 추구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변절에 대한 일말의 죄의식도
없는 남자. 그토록이나 당당하여 그 싸가지 없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그를
비난하게 만들수도 없는 남자.
장편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켄신에게 도전해오는 많은 인물들의 당위성이나
캐릭터에도 세심한 배려를 빼놓지 않은 작가의 열정 덕분에 그 많은 인물들 하나하나를
곱씹어 나갈수 있었다. 글쎄, 내가 그 시절을 살지 않은 이상 어찌 그들을 일일이
이해한다고 말할수 있겠느냐마는 적어도 니들이 시대의 실패자는 아니었다라는 뭐 그런 생각...
다만 연재분이 길었고 워낙 동작이 큰 작품이었던 나머지 나중으로 가면 갈수록
내용 연결을 하는데 애를 먹어야 했다. 일단 번역되어 나오며 중간에 몇권이 빠지고
그 뒷편부터 나왔기 때문에 일차적인 상황설정이 부드럽게 연결되지가 못했고 한창
싸우다 끊기고 몇 달이 지난후에 다음 편을 보면 에에... 이게 전에 어땠더라 하는
생각 때문에 작품에 집중하지 못하다가 좀 익숙해질 만하면 다시 끊기곤 하는
리듬 때문에 애를 먹고는 했다. 하긴 그런 작품이 어찌 <바람의 검심> 하나일 까마는...
거기다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지나치게 비약적으로 커지는 스케일은 이거 드래곤 볼이야?
하는 우려를 지우지 못하게 했다. 특히나 도쿄편에 오면 갑자기 감당할수 없을 지경이
되어 버리는데 작가 스스로도 이 정도가 될줄은 몰랐다고 후기에선가 읽은적이 있다.
어쨌거나 일본만화 특유의 토너먼트식 대결은 여기에서도 유감없이 그 장기를 발휘하여
본인들이 1대1로 싸우면 그들이야 죽건말건 옆에 늘어선 사람들의 관전평까지 어찌
그리도 토너먼트식 대결의 특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는지...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한 것인만큼 역사에 대한 부분도 빼놓을 수가 없겠지.
그들의 메이지 시대는 우리에겐 불행의 시기였다. 개혁을 하고 혼란을 정비한 뒤
그들은 우리를 노리기 시작했으니까. 그 시절이 우리에겐 어떤 시기였나.
철종? 고종? 명성황후의 등장 전이었나? 우리는 그때 뭐하고 있었나.
강화도령 모셔다가 지 편들끼리 세력 갈라먹고, 벼슬팔고... 그리고 또?
형편 무인지경으로 왕위다툼 벌이다가 지들끼리 치고 박고...
불행을 자초한건 우리의 뼈저린 실책이었다. 그러면? 남의 나라 갉아먹으며
지들만 정당화 했던것도 우리가 어리석었기 때문인가?
뭐 어쨌건 만화는 만화 그 자체로만 보아야 한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진리다.
그러므로 갑작스레 등장한 새로운 시대에 당황하며 어리둥절했던 그들을 폄하할
맘은 없다. 몇백년을 이어져 오던 사무라이의 전통인데 어느날 갑자기 칼을
빼앗기고 평범하게 살라면 얼마나 당황스러울지도 이해하지 못할 맘은 없다.
몇백년을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 그들의 정신마저 그리 박혀버렸을 터인데
새로운 검의 성능을 시험한다고 길가던 아이를 베어 죽여도 감히 사무라이에겐
반항하지 못했던 자랑스런(?) 그들의 역사인데 이젠 진검을 버리고 목검이나
휘두르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설령 그칼이 우리 목끝을 졸랐다해도 말이다.
아마도 내가 첨부터 끝까지 같은 마음으로 <바람의 검심>을 편하게 보지 못했던
이유는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가장 촌스럽게도 만화에 현실을 직시해서 본 이 나의
어리석음이 그들이 아무리 멋있게 칼을 휘둘러대도 그것이 묘한 답답함이 되어
내 목을 조른 것이다. 불과 몇십년 후의 그들의 역사를 알고 있기에 말이다.
더구나 만화의 내용만 보자면 그 시대에 환상을 가지고 보기에 충분한 것을...
적어도 세도정치에나 시달리고 있던 내 땅보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바람의 검심>은 내게 상당히 재미있었지만 그다지 유쾌하지는 못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 그 이유를 순전히 작품 안에서만 찾으라고 해도 지나친 비약이나
확대, 토너먼트식 대결구조 등등의 허술하지 않은 몇가지 당당한 이유가 있지만
누군가 순전히 지역감정(?) 때문이라고만 몰아 붙인대도 그다지 반항할 맘은 없다.
어쨌거나 작품을 완전히 몰입해서 읽으려면 작품을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는 소린데
메이지라는 시대 배경은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프랑스 혁명 보다도 내게 이해할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지 않았다. 또한 이해하려는 의지또한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나는 '그들'이 아니며 '그들'이 될맘도 없으니까...
이 글은 8/11/01에 쓰여진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