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흐름을 따라 두서 없이 마구마구 흘러가보자.
1. 미국에서 인생의 3분의 2 가까이를 살았다. 살다살다 미국 땅에서 락다운에 통금까지 경험하게 될 줄
불과 6개월전만 해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BLM (Black Lives Matter) 시위 당시를 기억한다.
핸드폰에서 8시 통금, 6시 통금 등의 Alert이 마구 울렸다. 우리 집에서 불과 1마일 가량 떨어진 지역의
상점이 깨지고 불타고, 하늘에서 헬기 소리가 정신없이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으며 난 뭘 했더라.
혹시나 해서 잠시 꺼 놓았던 CCTV를 다시 켜고, 문단속을 잠깐 하고, 밤 열시 쯤에 샤워를 하고 12시쯤에 그냥 잤다.
아주 잘 잤다. 열시간을 내리 자고 일어나 뉴스를 확인했더니 큰 피해는 다행히 한인 타운을 빗겨나기는 했다.
500백여명의 주 방위군이 이번엔 한인타운에 투입되었다.
일련의 바이러스와 사건들은 생계와 직결되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가장 원초적인 것이 가장 철학적인 명제가 되었다.
2. 아마도 대충 1995~96년 사이의 일이 아니었을까. LA 한인 타운에 살며 밸리 지역의 고등학교에 다니던
무렵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재빨리 다른 클라스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는데 그 날 따라 반원들이
모두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고, 선생님은 뜬금없이 TV를 틀었다. 아마도 클라스 시작 무렵 이미 얘기를 했을
것이지만 당시의 나는 아주 영어가 빈약하던 무렵이라 나만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 다시 자리에 앉았고,
TV 화면은 OJ 심슨의 재판정을 비춰주고 있었다. 몇 마디 말이 오가고 판사는 판결문을 읽었다. "He is not guilty."
전처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OJ 심슨은 그 날 무죄가 되었다.
흑인 클라스 메이트들은 환호했고, 백인들은 분노하며 부당함을 어필했다.
혹시 OJ 심슨이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대규모 시위나 폭동이 생길 가능성에 대해 이미 여러 매체들이
로드니 킹 사건에 비추어 보도를 한 바 있었기에 학교에서까지 그 사안을 중히 여겨 TV 생중계를 학생들에게
보여주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약간 혼란스러워 하며 교실문을 나서는데 여기저기 교실에서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며 각자 자신들의 인종과 이익에 충실한 분노, 환호, 고성들을 쏟아내었다.
살인 사건이 인종 갈등으로 대립하는 그 순간을 목격하며 나는 얼른 화장실로 향했다. 괜히 급했거든.
그러고도 거의 25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 때 생각이 나는건 우스운 일이다.
3. 나는 4.29 폭동 다음해에 미국에 왔고, 폭동 당시 한인 사망자가 발생했던 지점 바로 한 블럭 앞에 살았다.
안타깝게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고등학생이던 유일한 한인 사망자는 한인 타운 호바트와 3가 당시
원산면옥과 미주리 등의 식당이 입점해 있던 몰 앞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지금은 낙지 마을이 있는 곳이다.
후에 고인의 흉상이 제작되었지만 모실 곳을 찾지 못해 방랑중이라고 올 해 4.29 특집 기사에서 읽었다.
4. 당시 고등학생이던 남자 선배들 몇이 한인 타운을 지켜 보겠다고 자경단을 찾아갔더니 아저씨들이 얼라들은
가라며 웃으며 돌려보내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친구들 몇은 사건이 촉발되던 당시 학교에 있었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부모님들께 전화를 해야 한다며 번호를 받아 가더라고 했다. 학생들을 급히 집으로 돌려 보내야 하는데
혼자 보낼 수 없으니 부모님들께 픽업을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지금처럼 누구나 셀폰을 가지고 있는 시기가 아니다보니
늦게까지 연락이 되지 않았던 부모님들도 계셔서 친구들 몇은 학교에 꽤 늦게까지 남아 있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몰라 별로 무섭지도 않았고, 학교 오피스에서 부모님 기다리며 초콜릿도
얻어 먹으며 친구들끼리 수다 떨며 나름 잘 있었다고 한다.
5.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싶어한다는걸 나는 마흔 무렵에 알았다. 그 진리를 깨달은 순간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나성인이 언급했던 주님의 영광 교회는 나도 자주 그 앞을 지나치는 곳이다. 큰 교회라는건 알았는데 결혼 적령기
한인들이 많이 간다는건 몰랐다. 그런걸 모르니 내가 아직도 시집을 못 갔지. 하하하.